대학생 때쯤이었을 것이다. 또래들이 열광하고 깜짝 놀랄 만한 화보 하나가 공개됐다. 당시 최고의 팝스타였던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만삭 사진이었다. 은은한 베이지색 드레스와 그녀의 금발은 찰떡같이 잘 어울렸고 드레스의 윤곽을 따라 크게 부푼 배가 드러났다. 임신을 하고도 이렇게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데 조금 충격을 받았다.
‘임신해도 이렇게 예쁠 수 있구나. 만삭에도 사진을 찍을 수 있구나.’
임신에 대한 지식이 백지 수준이었던 나는 만삭 정도면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줄 알았다. 배가 가득 부풀어 오르면 당연히 거동이 힘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졸음이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이 생각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친구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과 놀람을 경험했는데, 우리 세대에서 만삭 사진에 대한 환상은 아마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찍은 화보의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다.
이후로도 임신을 ‘숭고함’으로 설명하는 수많은 말과 글을 접했다. 그럴 때면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기가 임신이라고 느껴졌다. 나 역시 그 환상에 동참한 적도 있다.
‘나도 언젠가 임신하면 늘 좋은 표정으로 예쁜 옷만 입고 지내야지.’
하지만 예쁜 옷과 메이크업, 잘 다듬은 헤어스타일을 임신 기간에는 유지할 수 없음을, 그보다 더 중요한 난제를 감당하려면 예쁜 옷을 고를 틈조차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중 일찍 결혼한 친구의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20대 중반에 가까워져 올 무렵 결혼해 출산한 친구였다.
친구는 결혼과 동시에 아이를 간절히 원했고, 그렇게 품에 안게 된 아이가 너무나 소중해서 한순간도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랬던 친구는 예전에 비해 걸음걸이가 조금 느려졌다.
“산후조리하면서 꼬리뼈가 잘못 붙었어. 지금도 매일 아파.”
몸을 지탱하는 뼈 일부가 잘못 붙었다는 무시무시한 소식을 친구는 웃으면서 전했다. 친구의 성격을 생각하면 꼬리뼈뿐만 아니라 다른 뼈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출산을 선택했을 것이다.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밤마다 등줄기를 타고 저릿함이 올라와 몸서리치더라도 몹시 낳고 싶었던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럼 너 평생 꼬리뼈 아파야 돼?”
“뭐, 그렇지. 수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아프면 가끔 병원 다니면서 지내는 거지.”
당시에 이해할 수 없었던 친구의 모습은 이후 결혼한 친구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볼 수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거의 매달 결혼식이 있었고 친구들은 디테일이 조금씩 다른 드레스를 입고 결혼을 했다. 가끔 웨딩촬영 스튜디오가 같기라도 하면 친구들은 얼굴만 조금 다르고 똑같은 앨범을 소장했다. 그리고 결혼 후 1년에서 2년 사이에 여기저기서 임신 소식이 들려왔고, 비슷한 절기를 겪으며 엄마들이 됐다.
그들 중에는 다행히 무탈하게 출산하는 친구도 있었고, 갖은 고생 끝에 출산하고 이후에도 지속해서 건강에 무리가 오는 친구도 있었다. 입덧이 너무 심해 몇 달 동안 식사를 하지 못하는 건 불편한 축에 끼지도 못한다. 호르몬의 영향으로 온몸이 가렵고 알레르기에 고생해도 임신 중이라서 약도 못 바른 채 지내야 한다.
그 흔한 감기에 걸려도 따뜻한 차나 물을 마시며 버틴다. 요통이나 척추의 통증으로 두들겨 맞은 듯 아픈 날도 숱하다. 임신하면 다들 겪는다는 치질이라는 병도 그저 웃어넘길 질환은 아니다. 남들 다 겪으니 괜찮은 병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설상가상으로 머리도 빠진다.
임신중독증이 오는 바람에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수십 킬로그램이 불어난 친구도 있었다. 결혼 전에는 40kg 중반의 마른 체형이었던 친구는 임신중독증을 겪으며 70kg까지 몸무게가 늘어났다. 산모의 목숨까지 심각하게 위협하는 게 임신중독증인데 사람들은 남의 속도 모른 채 이런 말들을 늘어놓았단다.
“임신하고 신나게 먹었구나!”
“이때다 싶어서 마음껏 먹으니 살이 찐 거지.”
누군들 임신중독을 겪고 싶고, 수십 킬로씩 살이 찌고 싶었을까. 또 아이를 낳았다고 늘어났던 체중이 바람에 흩어지듯 사라지지도 않는다.
어렵사리 출산이라는 미션을 수행한 뒤에는 온몸에 관절 질환이며 치질을 비롯한 대장 질환이 평생 이어지기도 한다. 기초적인 생리 활동이 있을 때마다 통증과 불편이 찾아오는 대장 질환은 거의 불치병 수준이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끊어지듯 아프고 비나 눈이 내리는 습도 높은 날이면 허리와 골반이 무너지듯 아프다. 내 지인은아이를 낳고 류머티즘 관절염에 걸려 손가락마다 끊어질듯한 고통을 겪는다. 모유 수유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겪는 몸살도 어찌 가볍게 넘길 수 있을까.
그런데도 아이를 낳은 엄마들에겐 “수고했다, 고생했다.” 정도의 칭찬이나 “몸조리 잘하라.”는 가벼운 안부가 돌아올 뿐이다. 아이만 건강하게 태어나면 그만인 것이다. 오랜 기간 자신의 건강한 신체를 유지해온 노력이 물거품이 되더라도 아이를 낳으려면 모든 것을 희생해야 마땅하다는 사회의 공기 속에서 출산하는 여성의 건강은 본인의 것이 아니다. 마치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내 몸의 건강이 출산을 위해 무너져도 괜찮다는 듯 말이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축복과 기다림에는 아이와 산모 모두의 건강이 포함돼 있지만, 조리원에서 2주 정도 누워있으면 모든 게 원상 복귀가 되는 것처럼 가볍게 몸조리 잘하라는 말로 퉁 치고 만다.
임신과 출산으로 상한 건강을 되찾기 위해 치료나 관리를 받는 이들에게 부정적인 시선도 여성의 건강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언젠가 친구가 자신의 지인이 조금 비싼 출산 방법을 선택했다며 흉을 봤다. 딱딱한 수술실 분위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낳는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며 친구는 혀를 끌끌 찼고 한 마디 덧붙였다.
“옛날에는 엄마들이 아침에 애 낳고 오후에 밭 갈러 나갔어. 애 낳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런 돈 낭비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된장녀도 아니고.”
친구는 아침에 애 낳고 오후에 밭 갈러 갔던 옛날 엄마들이 인권을 착취당한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 엄마들이 나이가 들면서 온몸에 골병이 들고 허리가 굽어가는 게 친구를 비롯한 사람들에겐 ‘엄마의 숭고한 희생’으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애를 낳고 오후에 밭을 가는 게 쟁기질하는 소와 무엇이 다를까.
임신하고 낳는 과정에서 건강을 잃은 친구들과 지인들을 지켜보며 어느덧 내 마음속 임신이란 일생의 아름다운 절기에서 무너지는 절기로 얼굴을 달리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베이지색 드레스를 입고 있던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임신 기간에 어떤 알레르기와 각종 질환에 시달렸을지, 또 출산 후에는 얼마나 불편했을지, 다이어트에대한 왜곡된 압박은 어떻게 견뎠을지 아찔하다.
사람에게 중요한 요소로 영혼이나 정신을 으뜸으로 꼽는다지만, 정작 몸이 없으면 영혼이나 정신을 어떻게 드러낼까? 몸은 나의 일부이자 전부다. 내 몸의 주체 또한 나다. 내 건강도 온전히 내 것이다. 내 몸의 건강은 아이를 낳기 위해 모두 내어줘도 무방한 가벼운 가치가 아니다.
아이를 원하는 산모가 건강을 조금 잃더라도 출산을 선택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다. 다만 그렇게 양보하고 희생하는 건강, 의도치 않게 잃어버리는 건강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산모 혼자만 알아서는 안 된다. 그게 당연해져서는 안 된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이유 중에는 내 한 몸을 갈아 넣어서라도 아이를 얻고 싶다는 욕구가 들지 않는다는 게 한몫했다. 어떤 불편과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아이가 있는 가정을 꾸려 다복하게 살고 싶다면 건강을 조금 잃더라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반면 자신과 배우자에게 더 집중하면서 살고 싶다면 낳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선택에 숭고함은 힘이 없다. 그래서 아이를 낳기 위해 잃어버린 건강과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불편을 ‘숭고함’으로 포장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렇게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