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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pr 21. 2021

반려견 계의 마리 앙투아네트

모카의 병명은 확실한 ‘밥투정’이었다.

처음 우리 집에 와 물에 불린 사료를 한 달쯤 먹다가 건사료를 아작아작 먹던 모카의 식탐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사료를 주면 누가 뺏어먹기라도 할 듯 급하게 먹고 더 달라며 앞발로 밥그릇을 닥닥 긁었다. 급하게 먹다 사례가 들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디선가 푸들은 입이 짧다고, 견주의 마음을 그리 애타게 만든다고 봤는데 우리는 해당사항이 아닌듯했다. 잘 먹어도 너무 잘 먹는 모카는 살이 잘 찌지 않았고 대신 팔다리가 쑥쑥 자라며 늘씬하고 키가 큰 푸들이 됐다.


그런데 모카의 생후 8개월 무렵 이상 징후가 감지됐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던 어느 아침, 그리 잘 먹던 모카가 사료를 먹지 않고 눈만 덩그러니 뜬 채 나를 바라봤다. 전날까지만 해도 싹싹 비우던 사료였다. 반려견이 평소와 다를 때 견주의 머리에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하나다.

‘어디가 아픈가?’


한 번도 밥을 거르지 않던 모카가 웬일로 밥을 안 먹으니 나는 온종일 안절부절못했다. 마침 다음날이 병원에 정기 방문하는 날이라 수의사에게 이 부분을 말했다. 수의사는 올 것이 왔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푸들이 원래 입이 짧고 밥투정도 심해요. 간식을 끊어보세요. 항상 사료만 주시고, 제때 밥을 안 먹으면 사료를 치우세요.”

“그럼 너무 배가 고프잖아요.”

“개는 한 끼 정도 굶는다고 큰일 나지 않아요. 오히려 습관을 잘못 들이면 앞으로 계속 사료는 안 먹고 간식만 먹으려 들 수도 있어요.”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개가 무슨 잔머리를 굴려 간식 때문에 밥도 굶을까. 나는 병원에 다녀와서도 수의사의 말을 곧이 믿을 수 없었다. 이 순수한 생명체가, 때 묻지 않은 이 작은 개 한 마리가 간식을 먹기 위해 밥을 굶는 무모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이튿날에는 더욱 기함할 일이 벌어졌다. 밥을 굶던 모카가 노란색 토를 한 것이다. 토를 한 후에는 힘없이 누워 나를 말간 눈으로 바라봤다. 또다시 나는 반려견이 평소와 다를 때 견주의 머리에 떠오르는 단 하나의 생각 ‘어디가 아픈가?’에 빠져들었다.


노란색 토는 개가 밥을 굶거나 배가 고플 때 하는 공복토일 가능성이 크다. 모카가 하루 이틀 굶었으니 공복토일 가능성이 있지만 어디가 아파서 밥을 안 먹는 건 아닌지 몹시 걱정스러웠다.

‘안 되겠다. 역시 병원에 가야겠어.’


모카를 데리고 병원에 갈 채비를 하던 나는 수의사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 ‘밥투정’ 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닿았다. 만약 이게 밥투정이고, 단지 사료 대신 간식이 먹고 싶어 일부러 굶고 토한 거라면 간식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편식하는 털래미

거실로 나가보니 마지막 잎새를 찾듯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카가 가녀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발걸음을 천천히 냉장고로 향했다. 모카의 눈동자도 나를 따라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모카가 좋아하는 닭가슴살 육포를 꺼냈다.


육포 봉투의 바스락, 소리가 발생하는 0.01초 만에 모카는 벌떡 일어나 내 발밑으로 달려왔고 화려한 애교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육포를 요구했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모카는 어디서 이렇게 에너지가 펄펄 솟아난 걸까?


의심스러운 모카의 증상을 확인하기 위해 육포를 다시 봉투에 넣고 이번에는 사료 봉투를 꺼냈다. 사료 몇 알을 꺼내 모카 입가에 내밀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꼬리를 흔들며 방방 뛰던 모카는 급히 실망한 눈빛으로 사료를 외면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거실 러그 위에 드러눕더니 다시 창밖으로 마지막 잎새를 찾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걱정 없이 환하게 웃던 수의사의 표정을 이해했다. 며칠간 애간장을 바짝 졸여대던 모카의 병명은 확실한 ‘밥투정’이었다. 


이날부터 나와 모카의 밥상머리 다툼이 시작됐다. 간식 외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모카는 ‘간식 투사’가 됐다. 사료가 맛이 없나 싶어 새로운 사료를 사서 먹여보고, 입맛에 맞는 사료를 찾기 위해 30여 가지 사료 샘플을 구해 먹여봤지만 허사였다. 사료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이면 잘 먹는다기에 해봤지만, 효과는 한 번 뿐이었고, 영양제와 파우더를 뿌려봤지만 한두 번 관심을 가진 후에 다시 단식 그리고 공복토가 이어졌다.


마음 굳게 먹고 간식도 모두 끊어봤지만 모카와 나의 신경전만 고조될 뿐이었다. 정해진 식사시간에서 30분이 지나면 사료를 치우는 강수를 뒀지만 모카는 콧방귀만 뀌었다. 간식이 아니면 먹지 않겠다는 쇠고집은 흡사 반려견 계의 마리 앙투아네트 같았다. 빵 대신 과자를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는 그녀(물론 이 발언은 왜곡된 부분이 있다.), 사료 대신 간식을 먹겠다는 우리 집 모카.


애간장이 끓다 못해 찢어질 것 같은 날엔 모카를 따라다니며 사료를 한 알씩 입에 넣어줬다. 그럼 한두 알은 받아먹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단식이었다.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며 사료를 먹이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엄마의 저주가 있었다.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라. 그래야 네가 얼마나 별난 줄 알지.”


어릴 적 편식이 심하던 나를 따라다니며 밥을 떠먹이던 엄마가 늘 하셨던 말이다. 언니들과 달리 삐쩍 마른 몸에 편식은 심하고 잔병치레가 숱해서 엄마의 애간장을 끓어 넘치게 했던 내게 한 번씩 치밀어 오를 때마다 하셨던 말. 그런데 그 말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말았다. 낳지는 않았으나 입양한 반려견이 나를 꼭 닮는 바람에 나 역시 엄마처럼 졸졸 따라다니며 사료를 먹이고 있는 현실이란.


그리고 사료를 한 알씩 먹이다 나 역시 한 번씩 치밀어 오를 때마다 모카에게 외치게 된다.

“이 못된 계집애야, 거리에 유기견 친구들은 지금 배를 곯고 얼마나 힘들게 사는데! 모카 너는 감사히 먹어야지!”


곁에서 듣던 남편은 소말리아와 북한 아이들과 비교하며 밥 깨끗이 먹으라고 훈계하던 어른들이 떠오른다며 핀잔을 줬다. 나라고 이런 종류의 훈계가 좋을 리는 없다. 하지만 자식 같이 키우는 존재의 끼니를 챙겨 먹이는 게 이토록 힘들 줄 알았다면 편식하던 과거로 돌아가 내 앞에 놓인 밥 열 그릇쯤은 깨끗이 비우고 싶은 심정이다.

올해 모카의 두번째 생일. 올해는 모든 음식을 제가 직접 만들었답니다:)

이렇게 될 줄 꿈에도 몰랐던 반려 생활 이전의 나와 오늘의 나. 개를 키우기 전에는 몰랐던 끼니 챙기기의 수고로움이 하루 두 번씩 나를 찾아온다. 공복토를 할 정도로 허기를 참고 간식을 기다리는 모카의 잔꾀가 너무나 얄미우면서도 곡기를 끊고 버티다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든다.


하지만 반려견의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기엔 우리에겐 무언의 선이 있다. 밥을 제때 먹고, 운동을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을 자고, 외출 후에는 손을 씻어야만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처럼 반려견에게도 요구되는 적정선이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고, 기분 좋은 순간에 소량의 간식을 먹을 수 있다는 선 정도는 지켜야 모카의 일상과 건강이 무너지지 않기에 우리 사이의 끼니를 두고 벌이는 신경전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일이다.


요즘은 약간의 요령이 생겼다. 새로운 사료를 주면 초반에는 잘 먹는 편이라 두어 가지 사료를 사서 며칠씩 번갈아 먹이는 거다. 거의 일주일 단위로 사료 두어 가지를 돌려 먹이지만 모카 입장에서는 “웬일로 매주 새로운 사료를 주는 거지?”라며 기분 좋게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간식을 바라며 단식투쟁을 벌이던 모카의 잔꾀처럼 견주에게도 늘어가는 잔꾀가 있다.


*오늘은 모카 댕스타그램도 공개

https://www.instagram.com/mocha_cream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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