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Dec 22. 2021

사랑하는 강아지

PROLOGUE     

사랑하는 강아지     


흔한 욕 중에 ‘개새끼’가 있다. 욕이 주는 불쾌함과 더불어 애정 어린 존재가 욕으로 전락하는 데 매운 마음이  들곤 했다. 내가 알기로 개새끼는 개의 새끼, 우리가 아끼며 키우는 강아지이다. 나는 강아지를 소중히 여기며 키우는데, 어째서 이 어여쁜 생명체가 욕이 되어야 할까. 그렇다고 누가 “개새끼야!”라고 욕하는 것을 두고 “강아지야!”로 고쳐 말해 달라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나.


그런데 얼마 전 책을 읽다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개새끼란 욕은 개의 새끼가 아니라는 거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니 개의 새끼를 뜻하는 개새끼는 개와 새끼를 띄어쓰기하거나 강아지라는 표현을 써야 한단다. 접두사 개-를 붙이는 수도 있지만, 개새끼가 일반적인 표현은 아니라며 참고삼아 간단한 어원이 설명돼 있었다.


아, 이 홀가분한 기분이란. 내 소중한 반려동물이 욕의 존재가 아니라는 기쁨에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다. 내 기분과 기쁨에 취해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는 그까짓 게 뭐라고, 그야말로 개새끼가 대수냐고 말하는 것을 말이다. 요즘은 개가 사람보다 대접받는 시대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고, 개를 사람과 동등한 가족 구성원으로 여기는 것을 비웃기도 한다. 


그런데 실은 대수였다. 강아지는 대수였다. 

그 작은 생명체는 반려인의 삶을 발칵 뒤집는 존재다. 

집에 있는 강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집까지 뛰어가게 만들고 외출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버린다. 여가는 온통 강아지에게 내어주는 것은 물론 지갑을 털어 건강하게 키우느라 애를 쓴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지만 서로의 의사를 알아채는 신기한 소통에 푹 빠져버린다. 사람보다 조금 높은 체온에 파묻혀 안정감을 얻는다.


그리고 강아지가 세상을 떠나면 병이 난다. 이른바 펫로스 증후군이다. 존재의 차이로 태어날 때부터 사람보다 먼저 떠날 수밖에 없는 수명을 가진 개인데 도무지 인정하기 어렵다. 사실을 인정한 다음에도 칠흑 같은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토록 감정을 휘두르는 존재가 대수가 아니면 무엇이 대수일까. 

다른 개가 낳아준 새끼.

욕이 아니라 진정 내가 사랑하는 어떤 개의 아기. 

나이를 먹어 노견이 돼도 내게는 끝까지 어린 강아지.


나는 사랑하는 강아지 여름이를 잃고 긴 우울과 슬픔의 펫로스 증후군을 경험했고, 다시 다른 개의 새끼인 모카를 키우며 펫로스 증후군을 매듭지었다. 그 시간은 무려 15년이었다. 


다시 시작한 반려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사람보다 먼저 떠날 수밖에 없는 존재와의 동거, 집에 있는 강아지가 보고 싶어 늘 일찍 귀가하는 일상, 따끈한 체온에 푹 빠져 함께 뒹굴거리는 반려생활.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다시 시작한 반려생활에서 모카와 나는 함께 성장했고,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어려움을 이겨내며 어제보다 성숙한 오늘을 맞이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펫로스 증후군을 앓게 될 미래가 남아있다. 어쩌면 끝나지 않을 나의 펫로스 증후군. 그 시작과 영겁의 사랑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