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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29. 2023

신조어가 쓰고 싶다

타인의 감각을 분별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언어유희

가을의 초입, OTT 기업의 초대를 받아 행사 하나에 참석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초청해 편안하게 대화하며 식사하는 자리였다. 식사하면서 초청 기업이 몇 가지 퀴즈 게임을 진행했다. 경품이 꽤 걸려 있었다. 내 앞에 앉아계셨던 작가님은 “여기 경품이 거의 살림 장만 수준”이라며 분위기를 부추기셨다. 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머릿속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슴속에서는 승부욕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퀴즈가 시작됐다. 시험지를 나눠주고 재미 삼아 문제풀이가 진행됐다. 평소 OTT 구독은 하지만 뭘 자주 보는 타입이 아닌지라 절절 매고 있었다. 내면의 승부욕이 진땀을 흘렸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괜찮아, 있다가 스피드 퀴즈 같은 거 하면 진가를 발휘해 보자.’


이윽고 내가 기다렸던 스피드 퀴즈 시간이 됐다. 진행자는 요즘 유행한다는 ‘이모지 퀴즈’를 준비했다고 했다. 이모지 퀴즈? 그게 뭐지? 하는 순간 퀴즈가 화면에 떴다. 이모티콘 열댓 개 정도가 주르륵 띄워졌다.


영문을 몰라 조용히 화면만 보는데 어찌 된 건지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정답을 외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맞추는 거다!

아니, 나는 이게 지금 뭐 하는 건지도 모르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문제를 읽고 답도 맞히다니!

나는 빨리 손을 들고 퀴즈를 맞혀야 하는데 퀴즈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외계어야, 뭐야!

거대한 충격이 밀려왔다. 너무 부끄럽지만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문제를 맞히는 동안 포털 앱을 열고 검색해 봤다. 이..모..지..퀴..즈..

이런 게 이모지퀴즈라고 합니다..

같은 테이블 사람들이 혹여나 이런 나를 볼까 어깨를 굽혀 핸드폰을 살짝 가리고 이모지 퀴즈 검색결과를 읽었다. 내면의 승부욕은 이런 나를 수치스럽게 여겼는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 빼고 다들 MZ인가? 연령대를 보면 또 그건 아니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으로 퀴즈 시간 내내 나는 합죽이가 되었다, 합!


다음날까지도 이모지 퀴즈 앞에서 느낀 수치가 여운을 풍기고 있었다. 아침 일찍 PC를 켜고 다시 이모지 퀴즈를 검색했다. 몇 가지 예제가 있어서 봤는데 역시 봐도 잘 모르겠다. 여러 개 보고 연습을 좀 해보니 살짝 이해가 될 듯 말 듯했다. 그리고 생각난 김에 정기적으로 알아보던 ‘2023 신조어’를 검색했다.


신조어 같은 걸 뭐 하러 검색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업무상 필요를 느껴 몇 해 전부터 분기에 한 번 정도 검색하며 기억에 남는 부분은 숙지해 왔다. 일을 하다 보면 종종 클라이언트가 요즘 2030 세대가 좋아할 만한, 재미있는, 톡톡 튀는 신조어를 넣어 쓰는 컨텐츠를 요구할 때가 있다. 기사나 브랜드 소개글 같은 종류는 정제된 언어로 간결하고 명확하게 쓰는 게 맞지만, 홍보를 위한 컨텐츠와 시즌성 카피라이팅은 결이 조금 다르다. 그래서 신조어를 적절하게 사용하면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나는 아직 스스로 젊다고 생각하지만,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젊음과는 간격이 꽤 있는 모양이다.


이런 사정으로 정기적으로 신조어를 검색하고, 기억에 남는 단어는 직접 활용도 한다. 유행에 민감했던 10대나 20대 때는 결코 하지 않았던 일들이다. 그 나이 때는 젊은 세대의 신조어를 따라 하려는 어르신들이 얼마나 웃겼는지 모른다. 그 웃긴 일을 마흔 먹은 내가 이제 하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신조어를 익히고 활용하려 애쓰지만, 젊은 세대와 다른 게 있다면 적절한 순간에 바로바로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왁자지껄 웃었던 어떤 자리가 끝나고 집에 가면서 유쾌했던 순간을 곱씹다 보면 ‘아, 아까 이러이러한 신조어 쓸걸!’과 같은 후회가 찾아온다. 꼭 한 박자 늦게 신조어가 떠오르는 걸 보면 어디선가 배운 신조어 하나 몇 년씩 주구장창 쓰는 우리 엄마가 떠오른다.

이모지 퀴즈 하나 못 알아들어 다음날 신조어 검색하고 있는 마흔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어를 쓰고 싶다. 내가 요즘 사람은 아니어도 요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싶진 않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눈앞의 외계어가 무엇인지 벙찐 얼굴로 있기보다는 무슨 말이든 제대로 알아듣고 싶다.


그리고 신조어는 사람들의 변화와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언어로서 가치가 높다. 무조건 가볍게 볼 언어는 아니다. 한 번씩 신조어 하나만으로 대화에 웃음이 피어나는 순간을 우린 모두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내가 요즘 좋아하는 신조어는 ‘킹받네’다. ‘열받네’라고 말하면 너무 진지하다. 전류가 찌릿, 하고 흐르듯 열받는 순간은 아무래도 ‘킹받네’가 맞다. 어쩌다 황당하게 열받는 순간 재빠르게 ‘킹받네’를 말하고 나면 몹시 흡족하다. ‘킹받네’ 한 번 썼다고 젊어진 기분이 드는 내가 있다.


물론 신조어를 잘 쓰고 못 쓰고는 나이에 비례하진 않으니 미리 마흔을 겁낼 필요는 없다. 내 남편은 올해 서른다섯 살인데 나보다 신조어를 훨씬 못 쓴다. 몇 달 전인가 회사 후배들이 내 남편에게 ‘핑프(핑거프린세스)’라고 했다고 한다.


그 얘길 듣고 ‘도대체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군거야?’하고 생각한 나와 달리 남편은 자신을 왕족처럼 생각한 거니 좋은 뜻 아니냐고 되물었다. 남편은 ‘머선129’도 최근에 쓰기 시작했다. 며칠 전 “너 T야?”라고 농담했더니 “무슨 티?”라고 되물어 또 나를 킹받게 했다. 이런 남편도 대화 중에 신조어를 쓰고 싶은 갈망을 종종 드러내곤 한다.


신조어는 그런 거다. 가벼운 우스갯소리자 타인의 감각을 분별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언어유희. 적절한 타이밍에 갖다 쓰면 만족감이 흐드러지는 귀여운 유행어.

그러니 쓰고 싶다. 더 격렬하게, 더 적극적으로 신조어가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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