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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13. 2023

오늘의 MBTI

오늘의 MBTI와 내일의 MBTI는 다를지 모른다.

2년 전쯤 MBTI 검사를 했다. 선도자 유형의 ENFJ가 나왔다. 딱히 위대한 사명이 있거나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어쨌든 그렇다고 한다. ENFJ 유형의 사람은 인간관계를 맺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고 집단을 상대하는 대화에도 적극적이라 한다. 확실히 나에게 그런 면이 있긴 하다. 


아동기에는 차분한 편이었는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활발하게 변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으면 금방 말을 붙였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가끔 동호회를 열어 리더 역할을 했고, 지금도 지역에 책모임을 열어 6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리더십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이렇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최근 들어 조금씩 의문이 들었던 건 내가 인간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 정말로 리더십이 있는지 헷갈려서다. 어디서나 말을 잘하고 사람들의 주목도 곧잘 받던 나였지만 요즘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낯선 사람들과의 자리에서 먼저 물꼬를 트기보다 타인이 만들어가는 대화를 지켜보며 그 안에 스며드는 게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날에는 본래의 사교성이 돌아와 분위기를 주도하고 웃고 떠드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어떤 날에는 충분히 분위기를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귀찮아져 말하기 싫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람과의 만남을 연이어 갖기 어려워졌다는 거다. 업무적인 미팅과 인터뷰를 제외하고 개인적인 인간관계의 자리는 연속으로 갖는 게 몹시 피로해졌다. 그래서 하루 약속을 잡으면 최소한 하루는 집에서 쉬어야 했다. 집에서 쉴 때는 핸드폰도 잘 보지 않고 책을 읽고 그림을 그렸다. 과거에는 사람들과 어울려 대화하고 새로운 것을 접하며 내면을 환기했는데, 이제는 홀로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해진 거다.


그리고 이런 면을 나만 겪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얼마 전 알게 됐다. 한두 살 터울로 이루어진 지인들과 식사하는 자리였다. 각자 MBTI를 말했는데 모두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게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I 성향이 강해진다는 거였다. E 성향이 사람이 I 성향으로, I 성향이었던 사람은 좀 더 짙은 I로 조금씩 변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한 친구가 말했다.

“그런데 점점 I가 돼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나이 들면서 인간관계도 조심스러워지고 서로 부담될까 봐 말을 가리기도 하잖아.”


확실히 그런 면이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말실수를 할 수 있고,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례가 살면서 몇 번쯤은 있지 않나. 그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입 앞에 필터를 장착하고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게 예사였다.


또 나이가 들수록 고민되는 게 ‘지인’과 ‘친구’의 차이였다. 알고 지내는 정도의 지인은 얼마든지 있다. 아는 사람, 아는 언니, 아는 동생, 아는 분. 하지만 그들 중에 누구를 ‘친구’라 명해도 서로 어색해지지 않을까?

“저는 이제 친하다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같이 운동하는 언니들하고 자주 어울리고 속 얘기도 다 하고 그러거든요. 분명 잘 지내고 재밌게 지내는데 친하냐고 물으면 바로 답을 못할 것 같아요.”

“맞아, 나도 그래. 우리 애 친구 엄마들하고 정말 잘 지내거든. 자주 얼굴 보고 어울리지만 그들과 내가 친하다거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건 잘 모르겠어. 나이 들수록 사회에서 친구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것 같아.”

또래의 우리들은 모두 그렇게 사람과의 거리감을 재는 데 곤란해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앎에서 오는 안도감과 더불어 나 역시 E에서 I로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곰곰이 짚어보게 됐다. 


그나마 나는 대인관계에 있어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한 시그니처가 있다. 상대와 나의 관계를 조금 단단하게 만들고 싶을 때, 언젠가 속 이야기를 털어놓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내 감정을 고백해 버리는 거다.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너랑 친하다고 생각해! 난 너랑 대화하는 거 좋아!”


이렇게 말해버리면 대부분의 사람은 웃으면서 나도 너랑 친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한다. 물론 속마음은 다를 수 있지만 상대가 보여준 여린 속내에 대개 마음의 빗장은 열리게 마련이다. 다만 저런 고백에 당황하거나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겐 더는 치댈 수 없다. 그 사람은 내가 진짜 별로인 거다. 친하다느니 뭐니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인 거다.

낙엽마저도 이렇게 각양각색인데 설마 나를 알파벳 4개로 어떻게 다 표현하겠어..

이런 나만의 시그니처를 생각하면 여전히 나는 E 성향 같기도 하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MBTI를 검사해 봤다. 나는 다시 ENFJ로 나왔다. 여간해선 변하지 않는 선도자이자 나대기 대마왕 성격의 나였다.


사람들 말처럼 나이가 들면서 성격과 성향은 변한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E 성향이었다가 만사 귀찮아지면 I 성향이 나오기도 하고, 나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 공감하는 F였다가 어느 순간엔 환장하도록 직설적인 T가 되기도 한다. 마흔에 가까워져 오며 사람들은 사회와 인간관계의 학습량이 꽤 두터워졌고 자신만의 처세술과 기준을 만들고 있다. 


그러니 MBTI라는 네 개의 문자가 오늘의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오늘의 MBTI와 내일의 MBTI는 다를지 모른다. 지난날 외향적이었던 나와 오늘날 내가 가진 외향성은 밀도가 다르다. 시간이 흐를수록 성격과 성향이 달라지는 당연한 흐름을 이제는 부담 없이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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