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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22. 2023

없는 것보단 밝히는 게 낫다

너무 연연하고 싶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것, 바로 돈

프리랜서 작가로 일해서인지 내 수입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프리랜서 작가를 지망하는 분들에겐 정보제공 차원에서 대략의 수입을 알려드린 적은 있다. 그런 사례를 제외하고는 그저 “벌 만큼 벌겠죠.” 정도의 말로 얼버무린다. 도대체 사람들은 타인의 수입이 왜이리 궁금한 걸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타인에게 연봉을 묻거나 액수를 짐작하기 위한 질문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다. 무엇보다 그걸 물어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마 돈에 너무 연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살면서 돈이 필요하니까 벌긴 하되 조금 꼬장꼬장하게나마 글을 쓰는 사람이 너무 돈, 돈 거리면 볼썽사나울 거란 인식이 있었다. 


그런데 사실 이 인식도 오랜 고정관념 아닐까. 애널리스트는 돈을 밝혀도 되지만 작가는 돈을 밝히면 안 되나. 유튜버는 광고를 하고 협찬을 받는데 작가는 광고하면 없어 보이나. 누구도 그런 기준을 세운 적 없지만, 그저 쓰는 사람으로서 갖추고 싶은 덕목에 내가 부러 끼워 넣은 고정관념 아니었을까.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마흔의 언저리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돈의 필요 더욱 냉정하게 각인됐다. 돈이란 나의 자존심을 윤택하게 만들면서 한편으로 상처 주는 존재라는 사실이 내 안에 축적됐기 때문이다. 돈이 있으면 조급함이 없고 행동거지가 적당한 속도를 띤다. 주변 사람에게 적당한 성의를 표현하기 좋고, 다양한 경험을 사는 데 스스럼이 없다. 


하지만 돈이 바닥이 났던 20대 시절 나는 분명 상처받았다. 몸이 아플 때 마음 편히 병원에 가지 못했고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이 술을 마시러 갈 때 나만 따로 빠져나와 아르바이트하러 갔다. 한 동기는 정말 궁금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언니는 왜 맨날 아르바이트해?”라고 물은 적 있는데,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사람도 있는 거다.


그러다 졸업하고 취직을 하며 조금 숨통이 트였고, 직장생활 연차가 많아질수록 삶이 편안해졌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벌어 저축이 가능해지면서는 일상에 선택지가 많아졌다. 이제는 돈 때문에 상처받을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이를 먹으면서 돈이라는 게 한 자루 칼처럼 다가온다. 젊어서는 없어서 괴로웠던 돈, 30대를 보내며 그 가치를 알아버린 돈, 이제는 더 현명하게 벌고 모아야 할 때라는 걸 알기에 남은 생을 앞두고 나는 다시 조급해지고 마음에 불덩이를 품고 지낸다. 칼날에 손이 베일지, 칼자루를 잡아 휘두를지 그동안 익힌 경험과 지식으로 빨리 판단해야 한다.


게다가 ‘나이가 들면 지갑을 열고 입은 닫으라’는 끔찍한 말을 실현해야 할 때가 머지않아 올 거라는 생각도 든다. 나이 들수록 실언하지 않도록 입을 닫고, 인심은 사야 하니 돈을 써야 한다는 그 말은 젊을 때 들으면 웃기지만 지금 나이에 들으면 식은땀이 난다. 생각지도 못하게 어딘가에서 내가 지갑 안 열고 쪼잔하게 군 건 없는지, 남들이 원치 않는 조언 타령하다 밉상이 된 건 아닌지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밉상이 되지 않도록 써야 하는 돈도 있고, 나이가 들기만 해도 돈 쓸 일이 많다. 병원에 가면 검사해야 할 항목이 자꾸 늘어만 간다. 나는 올해 국가에서 제공하는 건강검진 항목 외에 정밀검사를 3개 더 받았고, 곧 1개 항목을 더 받을 예정이다.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식사를 대접하기도 대접받기도 하며, 생일과 같은 날이 아니더라도 마음을 담은 선물도 전하는 순간들이 꽤 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정을 표현할 때 소요되는 어느 정도의 ‘선’이 있다는 거다. 경조사가 찾아왔을 때 적은 액수를 쓰면 이미지가 깎인다. 특히 나보다 어린 사람의 경조사는 좀 더 두둑이 챙기며 앞날을 응원해줘야 한다. 이런 순간들을 만날 때 궁색해지면 돈이 없던 20대 때보다 몇 배 더 초라해진다. 그런 어른들을 나는 이미 여러 차례 봐왔다.


젊을 땐 돈이 없어도 이미지가 훼손되진 않았다. 오히려 20대엔 돈이 없는 경우가 더 흔했다. 20대에 돈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청년기를 건너온 지금 시점에 돈이 없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흔쯤 되니 돈의 유무가 일종의 성적표가 되기도 한다.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현명하게 재산을 불렸는지, 주변에 얼마나 베풀었는지 알 수 있는 성적표다. 오늘 내가 쓰고 가진 게 나의 일부를 대변한다. 


오늘따라 재미없게 돈 얘기만 적었지만 솔직히 우리 중에 돈을 마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삶에서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막상 아프면 병원에 가서 돈을 낸다. 가족이 아파도 돈을 낸다.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뒤 먹는 저녁 식사에 돈이 필요하다. 너무 연연하고 싶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것, 없어서 허덕이는 것보다 조금 피곤해도 넉넉하면 좋은 것. 그게 바로 돈 아닐까. 


20대 초반에 빈궁했던 시기를 지나온 나는 다시는 돈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 않다. 직장생활 이후 돈이 없어 속앓이 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오늘만 살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요즘 홀로 공부 중이다. 팟캐스트로 경제뉴스를 꼬박꼬박 챙겨 듣고, 이메일로 도착하는 경제 콘텐츠를 구독한다. 경제만으로는 부족해서 사회적 이슈를 담은 콘텐츠도 구독하며 세상을 읽는다. 예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경제 서적도 일주일에 한 권씩 읽고 나만의 데이터를 만들어 본다. 이렇게 공부하는 시간은 일종의 보험과 같다.


돈에 연연하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돈은 확실히 중요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기에 오늘은 글 속에 돈이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사용했다. 돈을 밝힌다는 말은 사람을 빈약해 보이게 만들지만, 돈이 없다는 말보다는 백 배 낫다는 게 내가 밝혀낸 진실이다. 

없는 것보단 밝히는 게 낫다. 씁쓸하지만 또 절대 꺾을 수 없는 돈에 대한 사견이 마흔 무렵 이렇게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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