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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막뚱이 Oct 22. 2023

오손조손 여행기-전주에서 우당탕탕

첫 여행의 깨달음

할머니와 함께 하니 보이는 것들


여행의 날이 밝았다. 할머니는 혈압약, 골다공증 약, 안약 등 각종 약이 든 비닐봉지를 주렁주렁 가방에 넣고, 비누와 수건도 야무지게 챙기고, 아침부터 성화셨다. “아야 늦겄다, 얼른 인나라.(얘들아 늦겠다, 얼른 일어나라)”.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들처럼 이미 한참 전에 준비를 다 마치고 늦을까 봐 초조해하셨지만, 여행을 앞둔 설렘이 목소리에 묻어 나왔다. 할머니의 닦달과 우리의 느긋함 속에 다 같이 출발했다.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야심 찬 계획을 믿고, 일단 부딪치자는 심정으로 걱정과 설렘 속에 다 함께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나도 많이 안 타봤지만, 가끔 기차를 타면 할머니도 함께 기차를 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맛있는 걸 먹거나 좋은 걸 볼 때면 할머니도 한번 같이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곤 했다. 그래서 기차를 탄 것만으로도 버킷리스트 중 일부가 이뤄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예상 대로 할머니는 기차를 좋아하셨다. 버스보다 좌석이 넓어 편해하셨고, 바깥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셨다. 화장실은 가지 않았지만, 화장실을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사실로도 할머니는 마음이 놓이시는 것 같았다. (할머니와 여행할 때 화장실을 꽤나 중요한 고려 사항 중 하나다. 늘 체크해야 한다. 동네 다른 할머니들 모두 같은 어려움을 겪고 계신다고 하신다.) 다만, 단 한 가지 아쉬움이 있었다. 나 혼자 탔을 때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던 기차의 높은 계단과 플랫폼 사이의 넓은 간격이 할머니께는 커다란 장벽이었던 것. 그래도 다행히 차근차근 무사히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도착한 전주역. 전주역은 역 모양만으로도 전주에 왔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여행의 흥취를 잔뜩 만끽하고, 전주역에서 택시를 타고, 비빔밥 맛집으로 향했다. (택시기사님은 지금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친절하셔서 좋았다고 일기에는 적혀 있었다.) 전주 시민들께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내겐 전주는 비빔밥의 고향인 만큼 첫 끼는 비빔밥으로 정했다. 기대한 만큼 비빔밥은 굉장히 맛있었고, 할머니도 한 그릇 깔끔하게 뚝딱하셨다.


 식당에서 나와서 인근에 덕진 공원을 산책하다가 수목원으로 향했다. 수목원은 야외에 있는 공간인데도 놀랍게도 휠체어 대여가 가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로 붐볐고, 떨리는 마음으로 휠체어를 빌려왔다. 할머니는 처음엔 창피해서 그런지 휠체어 타는 걸 마뜩잖아하셨지만, 나중엔 편안해 보이셨다. 휠체어에 타고 계신 다른 할머니를 마주친 게 큰 몫 했다. 그래도 언덕이 꽤나 가파른 수목원, 물리적인 힘도 꽤 필요해서 미안함을 느끼신 할머니와 수목원 옥신각신이 약간 있었다. 휠체어 미는 노하우를 몸소 익혀가며 경사로를 오르내리며, 첫날 체력을 다 소진해 버렸지만, 휠체어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할머니와 함께 오지 못했을 공간에 와서 예쁜 꽃과 나무들,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구경하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누그러졌다. 좋은 것들을 함께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수목원은 넓게  구경하고, 할머니는 수목원의 식물들도 좋아하셨지만, 무엇보다 웨딩사진 찍은 커플, 뛰어노는 아이들 등 사람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지셨다.


 첫날 마지막 일정이었던 전주 한옥 마을도 휠체어와 함께했다. 주말 교통 체증으로 간신히 도착해서 휠체어를 후다닥 빌려와 할머니와 함께 전주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는데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할머니는 즐거워하셨다. 사실 사람들이 붐비기도 하고, 오히려 수목원보다 길이 울퉁불퉁해 휠체어를 끄는데 온 힘을 집중해야 해서, 사실 그날의 풍경보단 휠체어를 밀며 사람들과 부딪칠까 봐 긴장을 하며 느꼈던 감각이 더 생생하다. 닭도 중간중간 교대하긴 했지만, 보기에 불안 불안해서 사람들과 부딪칠까 봐 주로 내가 휠체어를 끌었다. 그래서 솔직히 내게는 여행이라기보다는 노동에 가까웠지만, 좋은 것을 함께 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고 있는 순간순간이 소중했다.



여행은 강요가 아닌 함께


중간중간 큰 소리가 날 때면, 죄책감과 자괴감 고단함이 뒤엉킨 복합적인 감정이 퐁퐁 솟아났지만, 이것마저도 다 여행의 과정이 아닐까. 신체 조건이 다른 식구와 함께 하는 가족여행은 또래와 하는 여행보다 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고 해서 내가 원하는 어떤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저것 보여주고 싶고 주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상대에겐 부담이 되는 일이 생기곤 한다. 첫 가족 여행은 그걸 깨닫고, 인정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강요하지 않는 것,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을 잊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힘든 고비와 갈등 끝에 더 돈독해져 버리는 게 가족인 것 같다. 그때의 힘듦과 별개로 가끔 전주여행을 말할 때면 모두 즐거운 기억만 남은 걸로 봐서는. 우리에겐 돌아갈 집이 있고, 숙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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