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입원은 단조로운 조손가정의 큰 이벤트였다. 어린 마음에는 그렇다. 여행이나 외식은 아예 선택지에 없던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게 병원은 또 다른 여행이었다. 여행이 한 사람의 삶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여행이 아닌 입원이 내 삶에 영향을 살짝 주는 그런 일이 생겼는데, 이름하야 양손잡이 된 썰 푼다.
나는 태어나길 왼손잡이로 태어났다. 본 투 비 왼손잡이랄까. 지금에야 왼손잡이들은 우뇌가 발달해서 창의력이 좋다, 똑똑하다 등 좋은 인식이 널리 퍼져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왼손잡이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시선이 있었고, 특히 옛날 세대인 할머니는 왼손잡이를 교정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셨다. 부모-자식 간에도 세대 갈등을 빚는 경우가 허다한데, 조손가정의 경우 심지어 중간다리 없이 한 세대를 통째로 건너뛰었기 때문에, 서로 다른 별에서 온 것 같을 때가 있다. 지금은 편견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쉽게 마주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왼손잡이에 대한 오해였다. 세대 차이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써보고 싶다.
아무튼 타고난 왼손 잡이었던 나는 할머니의 심기를 자주 불편하게 했다. 왼손으로 밥을 먹거나 하면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긴 하나 할머니는 어린이집 선생님께 내가 왼손으로 밥을 먹거나 글을 쓰는 걸 보면 손을 탁 쳐서라도 고쳐달라고 부탁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혼나 본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선생님께서 바람직한 한귀듣한귀흘(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기)을 시전 하시지 않았나 싶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러던 어느 날, 동반입원이 체질인지, 이번에는 닭과 함께 입원할 일이 생겼다. 입원한다는 것은 링거를 몸 어딘가에 꽂아야 한다는 것. 보통은 환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오른손잡이는 왼손에, 왼손잡이는 오른손에 링거 주사를 놓아주시곤 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왼손잡이인 나는 왼손에, 오른손잡이인 닭은 오른손에 링거 주사를 맞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하면 사실 매우 매우 심심하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병실에 하나씩 놓여있던 TV도 동전을 넣어야 겨우 작동했으며, 그마저도 채널 주도권은 아주머니들이 쥐고 있었기에 지루한 시간을 버티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미디어의 자극에 아직 노출이 덜 됐던 우리는 종합장 하나면 충분했고, 종합장과 연필로 지루한 시간들을 보내려던 순간. 아뿔싸 깨닫게 된 게 있으니. 왼손잡이였던 나는 오른손에, 오른손잡이였던 닭은 왼손에 링거가 꽂혀 있었던 것. 이거 뭐가 잘못됐다며, 칭얼거림을 충전하고, ‘할머니~~ 닝가(링거) 이래서 그림을 못 그리겠어!(=링거 오른손에 꽂아달라고 해줘) ’라며 시위의 포문을 열었다.
오른손으로 직접 그림을 끄적거리며 몸소 퍼포먼스 보여주려고 했다. 분기탱천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림이 잘 그려지는 게 아니겠는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태극기를 배우고, 한창 애국심이 충만했던 어린이는 학교에서 배운 태극기를 연필 잡는 것도 서툰 오른손으로 뚝딱뚝딱 그리기 시작하는데, 생각보다 잘 그려졌고, 살짝 당황했다.
생각보다 잘 그려지는 그림에 머쓱해진 나는, 찡얼거림은 쏙 들어가고, 그때부터 오른손 탐구를 시작했다. 어린이들에게는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게 된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어린이 스스로도 본인이 성장했고,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병실에서 종합장 한 권을 모두 다 채우도록 아직은 낯선 오른손과 친해지길 바랄 게를 찍다가 퇴원할 때는 어느 정도 양손잡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렸을 때라서 가능했던 것 같고, 참고로 그렇게 태극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태극기 그리기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기도 했다는 후문…)
그렇게 할머니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주 동작, 예를 들어 글씨 쓰기, 젓가락질 같은 동작들은 대부분 오른손으로 하게 되었고, 왼손으로 쓰는 글씨는 7살의 시간에 멈추고 말았다. 반면, 가위질, 망치질, 파리채 휘두르기 같은 원초적인 동작들이나 처음 하는 동작들은 대부분 왼손 잡인 걸 보면 타고난 건 역시 왼손잡이가 맞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림의 경우 왼손, 오른손 모두 자유자재로 가능한데, 다만 캐릭터 같은 동글동글한 그림은 오른손, 조금 더 세밀한 그림은 왼손, 서로 역할을 분담해서 하고 있는 사이좋은 두 친구들이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다. 역경은 때때로 뜻밖의 결과를 가져다주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도 한다. 내게 어떤 벽이 나타났고, 그 벽을 넘어서니 양손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알고 보니 최종 흑막은 할머니? 할머니의 큰 그림이었을까?
진실은 그때 왼손 혈관이 더 잘 보였을 뿐이라는 사실에 가까울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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