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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작 Mar 18. 2022

팝콘으로 본 <위플래쉬>(2014)

삶은 관점'들' 사이에

영화 <위플래쉬>는 팝콘 먹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두 장면 모두 네이먼(마일즈 텔러 )이 아버지(폴 레이저 )와 함께 합니다. 하나는 영화 초반에 나오고, 다른 한 장면은 영화 중반 조금 넘어 나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내용이 바로 이 팝콘 먹는 장면에 모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영화 초반 영화관에서 아버지와 팝콘 먹는 장면은 이 영화 전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차례차례 살펴보겠습니다.


1. 팝콘, 언제 먹을까?

    주인공 네이먼의 관점에서 팝콘은 플랫처(J.K. 시몬스 )와 만난 후에 한번 먹고, 플랫처와 헤어진 후에 한번 먹습니다. 언제의 기준으로 플랫처가 중요한 이유는 네이먼 내부에서 다른 사람의 시선 아래 종속된 자신이 작동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영화에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어린 시절 순수하게 드럼을 치는 영상에서는 카메라로 자연스레 응시하는 네이먼을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중간에 친인척들과 함께 네이먼이 식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메인 드러머가 됐다며 축하를 받는 와중 사촌이 "어떻게 음악으로 우열을 가려? 주관적이잖아? 밥 벌어먹기 쉽지 않은데..."라는 말하자, 네이먼은 참지 못하고 독설을 내뱉습니다. 또 그는 여자 친구(멜리사 베노이스트 )에게도 헤어지자고 통보하면서, 드러머로서 일류가 되는 데 있어 너의 존재가 방해물이라는 식으로 입으로 배설을 합니다. 네이먼 자신의 관점(perspective)에서 벗어난 모든 선택지(option)를 제거하고, 인정하지 않는 장면들입니다. 일종의 시선 독재가 이뤄지는 셈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기준 아래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그 서열의 최정점에 자신이 설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서고자 합니다.


    플랫처는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와 같습니다. 그는 네이먼이 모델링하고자 하는 버디 리치를 하나의 신화로 만들어 그의 영혼을 묶어 둡니다. 플랫처를 만난 이후 영혼이 피폐해진 네이먼은 플랫처의 폭력성이 어떻게 전이되나 영화에서 잘 보여줍니다. 앞서 말한 독설의 예가 그렇고, 자신을 학대하는 장면 모두가 그렇습니다.


    어쨌든 네이먼은 플랫처의 간택(?) 이후 영화 초반 팝콘 먹는 장면에서 아버지에게 "그에게 연주를 들려줬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아버지가 그가 "뭐라던?"하고 물으니 '그냥 그랬다' 정도로 표현합니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인생에는 다양한 길(options)이 있어"라고 말합니다. 이에 네이먼은 아버지의 대답에 실망했는지 초코볼1이 섞인 팝콘을 건네는 아버지에게 "초코볼 싫어해요"라고 말합니다. 이 대답은 세 가지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단순한 반감이고 다른 하나는 플랫처가 나를 선택했는데 아버지가 뭔데라는 오만함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글 후반부에 가서 밝히겠습니다.


2. 팝콘, 어디서 먹을까?

      한 번은 영화관에서 먹고, 다른 한 번은 집에서 먹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부분은 하나는 '영화'를 보며 먹고,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을 보며 먹는다는 점입니다. 미디어란 형식에서 영화는 이미 관객의 취향이 반영된 매체입니다. <위플래쉬>에서 쓰고 있는 용어인 관점(perspective)이 이미 반영된 매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영화라는 것은 이미 관객은 무엇을 볼지, 어디서 볼지 그 자신의 취향과 여러 고려 사항들이 반영된 선택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위플래쉬>에서 보여주는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주인공 자신이 선택한 길/학업/꿈에 대한 메타포에 해당합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하나의 시선; 관점으로 보여주는 영화를 복수 이상의 사람들, 즉 다수의 관점이 보고 있는 장면으로 <위플래쉬>가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형식의 맥락에서 아버지의 대사인 "인생에는 다양한 길이 있어"가 힘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플랫처와의 관계가 파탄 난 이후 네이먼은 자신의 집 소파에 앉아 아버지와 텔레비전을 보며 팝콘을 먹습니다. 앞서 [영화]가 [꿈]을 의미한다면 [텔레비전]은 [현실]을 의미합니다. 텔레비전이란 매체의 특징은 리얼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입니다. 녹화라는 기술이 등장하기 이전 텔레비전 방송은 곧 생방송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이란 미디어는 작위적 요소가 최소화된 매체라는 이미지를 갖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텔레비전 예능 방송을 보면서 등장하는 캐릭터를 캐릭터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방송인, 사람으로 보는 지점이 그렇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영화 <위플래쉬>를 보면서 캐릭터 '네이먼'을 생각하지 배우 마일즈 텔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듯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리얼'이라는 착시를 가장 쉽게 주는 매체입니다.


    네이먼이 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말한 다양한 길 즉 옵션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시간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영화는 채널이 없지만 텔레비전은 다양한 채널이 있습니다. 네이먼은 자신이 드럼으로 최고의 자리에 가겠다는 하나의 관점에서 소거시킨 많은 선택지들을 다시 복기해 보는 시간을 갖습니다. 헤어진 여자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하는 장면이 선택지들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3. 팝콘, 왜 알다가도 모르게 먹을까?

    다시 영화를 보며 팝콘 먹는 장면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서 "초코볼 싫어해요"라는 대답에 대해 네이먼의 '반감' 또는 '오만함'으로 인한 반응이라고 밝혔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바로 이 대목은 네이먼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초코볼 싫어해요"라는 네이먼의 말에 아버지가 "진작 말하지"라고 하자, 네이먼은 "피해서 먹으면 돼요"라고 합니다. 이에 아버지가 "알다가도 모르겠네"라며 해당 장면을 맺습니다.


    네이먼의 업(業)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악기라는 도구 중에서 드럼으로 자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연주자라고 해서 단순히 악보재현하는 연주 기계가 아닙니다. 연주에는 연주자 자신의 관점(perspective)이 담기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초코볼 싫어해요", "피해서 먹으면 돼요"라는 부분은 거진 20년간 형식적으로도 가깝고 실질적으로도 가까운 아버지에게 취향을 표현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네이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저 환경에 자신을 맞춰왔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표현을 업으로 하는 드러머를 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말대로 정말 "알다가도 모를"일입니다.


    영화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혼자 연습하다가 플랫처가 들어오자 연주를 멈춥니다. 그리고 플랫처가 왜 연주를 멈췄지라고 하니 다시 연주를 합니다. 그러자 플랫처가 "북치는 인형 같은 연주로 답을 하는군"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북치는 인형이 취향을 표현하지 않는 네이먼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관점을 드러내지 않는, 혹은 관점이 없는 연주하는 기계인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화 초반 팝콘 먹는 장면이 단순히 자식으로서 반감과 오만함이 아니라 네이먼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한 설정이라 생각합니다.


4. 팝콘각에서 벗어나, "I'll que you"

    이 영화에서 단 한 대사를 꼽자면 바로 "내가 신호를 줄게(I'll que you)"를 들 수 있습니다. 서울로 가겠다는 목적이 생기면, 그다음 거기까지 가는 방법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시간, 돈 등 여러 요소들을 생각해 보고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목적이 없는 상태에서 방법을 갖출 수는 있겠지만 이는 효율적이지 않고, 효과적이지 않으며, 무엇보다 불필요합니다. 드럼 박자를 '방법'에 놓고 보면, 그 박자를 밀고 당기는 것도 악보에서 나의 관점이, 해석이 작동하기 시작해야 그 표현을 가장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이 북치는 인형과 예술가의 갈림길이라 생각합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네이먼은 더 이상 플랫처에게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상태를 드럼 연주로서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플랫처와 같은 스승이 과연 필요한 것인가? 혹은 언제나 든든하게 지지해주는 네이먼의 아버지가 필요할까? 이 지점에서 저는 이 영화를 교육적 만남, 스승 등 우리 외부 환경적 요건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내부, 안의 목소리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플랫처와 네이먼의 아버지란 상반된 캐릭터는 우리 안에 있는 두 목소리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네이먼은 자연스럽게 즐겨하며 기꺼이 드럼을 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 분야의 최고가 되겠다는 결심이 섰고, 다른 사람이 봐도 네이먼은 그 방향으로 잘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고가 되겠다는 것만 남았지, 왜 최고가 되어야 하는지를 잃었습니다. 음악은 그에게 단지 최고가 되기 위한 수단이 된 셈입니다. 플랫처와 조우할 당시 네이먼에게 남아있는 관점이라곤 모두를 일렬로 세운 후 자신이 가장 꼭대기에 서겠다는 결심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도 인격체가 아닌 방해'물'이 되고, 사촌의 코멘트에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촌의 코멘트는 네이먼의 모순을 지적합니다. "어떻게 음악으로 우열을 가려? 주관적이잖아?"라는 대사는 즐거운 음악으로 왜 경쟁을 하려 하냐는 네이먼 안에 있는 플랫처의 관점을 자극하는 말입니다.


    하나의 관점으로 환원하려는 네이먼은 자신의 한계를 그런 식으로 깰 수 없음을 경험하고, 여러 관점이 있는 현실 세계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드럼을 칩니다. 그 이전의 드럼은 수단이라면, 이제는 그에게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어느 누구도, 플랫처조차 그에게 큐 사인을 줄 수 없니다. 박자를 밀고 당기고, 어떤 음악을 연주할지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 여러분의 라이킷은 다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라이킷을 먹고 자라는 호덕 올림.


1. 초코볼로 번역된 원어는 'raisinets'입니다. 건포도에 초콜릿을 코팅한 일종의 초코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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