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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작 Dec 26. 2021

'삶'을 중심으로 본 <베스트 오퍼>(2013)

삶을 타자화해버린 아이러니, 그 끝


1. 글을 열며

영화 <베스트 오퍼>는 삶의 다양한 모습에 관해 이야기를 해온 쥬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1956~ )의 연출, 각본 작입니다. 단일한 주제로 그의 필모그래피를 밝히기란 쉽지 않지만, 제 생각에 그는 영화에서 '삶'이란 주제를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해왔다고 생각합니다. <베스트 오퍼> 이전의 영화들은 삶의 특정 부분을 섬세하게 다뤄 삶이란 전체를 조망하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삶의 어떤 부분이 아닌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영화는 대가의 작품답게 영화 시작 첫 5분 동안 영화의 핵심 실마리를 모두 제시합니다. 이 실마리를 따라간 관객이라면 버질(제프리 러쉬 扮)의 마지막 대사인 "누군가 기다립니다"가 베스트 오퍼임을 눈치챘을 겁니다. 감독은 혹 그 대사가 베스트 오퍼라는 것을 놓칠까 봐 친절하게도 버질에게 '안경'을 씌어 놓습니다. 영화 내내 그는 경매장을 제외한 어떤 곳에서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이런 점을 놓친다면, "누군가 기다립니다"란 대사를 끝으로 올라오는 엔딩에 관객은 '어? 이게 끝이야? 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접촉; 맞물림; 의미로서의 삶

    주인공 버질은 곰팡이로 뒤덮인 수많은 물건 중에서 '진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눈을 가졌습니다. 예술품에 대해 범상치 않은 관찰력을 가진 그는, 그의 일상 역시 평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홀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그 순간에서조차 장갑을 벗는 일은 없습니다. 그가 장갑을 벗는 순간은 예술품 중에서 초상화를 감정할 때뿐입니다. 그가 세상을 향해 '접촉'하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가 갖는 유일한 '의미'이기도 합니다.


    '접촉'을 '의미'라 연결 짓는 이유는 영화에서 감독이 계속해 '톱니', '접촉', '삶', '의미'를 한 덩어리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감독은 '의미'라는 것이 홀로 있을 때는 있지 않거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능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마치 맞물리지 않고 혼자 도는 톱니바퀴처럼 말입니다. 사실 혼자 도는 톱니바퀴는 그 자체가 도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듭니다. 주인공으로부터 예술가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는 가작 작가이자 친구인 빌리(도날드 서덜랜드 扮)의 행위는 '의미'를 중심으로 주인공의 삶을 전복시킵니다. 정확히는 빌리에 대한 버질의 비난을 다음과 같이 되돌려준 것입니다.


"미술 좋아하고, 그림 그린다고 해서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닐세.
내면의 신비가 있어야지. 그런데 자넨 그게 없어."
<베스트 오퍼>, 빌리에 대한 버질의 비난 中

&

'삶을 좋아하고, (그냥) 살아있다고 해서, (정말) 사는 건 아닐세.
의미가 있어야지. 그런데 버질 자넨 그게 없어'
-버질의 위와 같은 비난에 대한 대칭; 빌리의 사기행각


3. 진짜 삶 VS 가짜 삶

    "가장 고통받고 축복받는 카탈로그를 위하여", 버질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그의 삶의 방식이 투영된 결과물을 망설임 없이 찢으며 내뱉은 말입니다. 단순한 사물에 지나지 않았던 카탈로그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입니다. 동시에 그의 인생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장면이기도 합니다. 외떨어져 있던 톱니바퀴가 그녀에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맞물려 돌아감이 빌리가 말한 "기쁨, 고통, 증오, 병, 회복, 사랑" 중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것이며, 살아있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의 가능성을 지닌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친구 빌리와 수리공 로버트(짐 스터게스 扮)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 클레어(실비아 획스 扮)의 사기극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한 버질의 인생을 파괴한 것일까요? 그가 삶의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을 소거해 버린 것인가요? 경찰서 앞, 버질의 망설임은 단순히 그가 정상적인 경로로 그림을 취득하지 못한 이유만일까요?

    

    엄청난 가치가 있는 초상화에 대해 버질이 회상하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습니다. 초상화들은 '사랑(=진정한 의미)'하는 이에 대한 기다림의 표상'일뿐입니다. 이에 그가 찾아 나선 것은 사랑, 즉 진정한 의미이지 껍데기가 아니었습니다. 충격에 빠진 그가 병원에서 보낸 시간은 "모든 위조품에는 진품의 미덕이 숨어 있듯", 사랑을 위조한 그녀에 대해 진품의 미덕을 어느 시간의 자락에서, 어느 시간의 빛에서 확인했던 것입니다.

    

    "누군가 기다립니다"란 마지막 대사는 분명 베스트 오퍼였을 것입니다. 영화 초반 그 어수선한 곳에서 '진짜'를 알아본 그가 온갖 거짓들로 뒤덮인 집에서 유일하게 진짜인 그녀를 결코 몰라봤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거의 끝냈어요. 마지막 장을 다시 쓰려고요. 밝은 결말로 갈까 해요"란 그녀의 '표시'가 그를 그곳에 있게 했습니다.


    사랑을 예술 작품이라 한다면... 낙찰받는 사람이 최고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주인공은 진짜 삶을, 진짜 사랑을, 진짜 의미를 누구보다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욕망하는 것이기도 하죠. 단지 차이는 누군가는 그 계기를 만들고, 다른 누군가는 그 계기를 기다린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은 그 욕망이 누구보다 컸습니다. 세상과 단절된 자기만의 공간에서 그 욕망을 채워나갔으니까요. 주인공에게 필요한 계기는 세상과 단절된 벽, 장갑을 벗길 그 무엇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친구 빌리의 사기행각은 진정한 친구로서의 행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네 친구! 자네가 만족하면 그만이지"라는 빌리의 말을 다시 떠올립니다.


    버질에게는 진실을 확인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 또한 친구가 남긴 기회일 것입니다. 진짜 클레어를 9번이나 마주했으며, 심지어 자신이 발견한 톱니바퀴가 '다른 데서 녹슬어 옮겨진 것'도 알고 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관찰력을 지닌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 '가짜'임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그가 '진짜'를 확인했기에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4. 불완전으로서 삶, 그게 삶!

    수리공 로버트가 완성해가는 로봇을 보며 "불완전하게 느껴져"라고 말한 버질의 대사, 이 부분은 버질의 캐릭터를 나타내는 동시에 감독의 삶에 대한 생각 - 삶은 불완전하다 - 담겼다고 봅니다. 버질이 삶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벽', '장갑'을 허물지, 벗지 못한 이유는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 불안을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관찰자의 입장에서 조망하면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삶 자체가 불완전한 것인데 그 불완전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피해 자신의 삶조차 타자화해버린 아이러니입니다.


    그의 이런 아이러니한 삶의 태도가 파괴되었음을 상징하는 대사가 바로 "불완전하게 느껴져"입니다. 사람이 아닌 사물만을 자신의 삶에 연결 지었던 이유인 '완전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죠. 물론 그 역시 사물도 또한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데려가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 그림들이) 당신을 기다리라고 가르쳐 줬어"라는 대사는 미끄러져가는 욕망인 동시에 완전성에 대한 유예로 불완전을 회피한 것입니다. 즉 사물도 불완전하지만 계속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함으로써 그 '끝'을 미뤄온 것이죠. 친구 빌리가 벌인 사기행각은 버질이 그 불완전함을, 즉 삶을 받아들이게 한 계기이기도 합니다.



* 이 글은 클리앙에 게시한 글을 2020년 12월 클리앙에 최초 게시 후 다시 다듬어 올립니다. 이 공간에서 클리앙에 올린 글을 차차 다듬어 올리는 동시에 앞으로 여러 감상문을 올릴 예정입니다.

** 여러분의 라이킷은 다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라이킷을 먹고 자라는 호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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