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인피니티 사가의 첫 영화로 <닥터 스트레인지>(2016)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오직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시간이 말해줄 거야(Time will tell how much I love you)"라는 한 문장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 이 한 문장을 위해 이 영화가 존재하는지 [사랑이 의미]이고, [의미는 분절에서 발생]하며, 그것이 담긴 [형식이 시간]임을 역순으로 검토하고자 합니다.
1. 시간
이 영화의 가장 큰 적(敵), 즉 안티(anti)는 [시간을 넘어선 존재]입니다. 그 안티를 일컬어 우선 [시간 없음]이라 합시다. 반면 우리가 사는 우주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는 것은 변화가 있다를 의미합니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는 것이죠. 이걸 [생성-변화-소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미를 연관 지어 생각해 봅시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와 같이 분절되지 않은 소리가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아아, 아아, 아아아] 이런 식으로 끊어진/분절된 부분이 있어야 의미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이 분절을 [죽음]이란 단어로 대체합니다. 영화의 안티인 [시간 없음]을 추종하는 세력이 피하고 싶은 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문장의 마침표와 같습니다. 하나의 완성된 텍스트로서, 문단으로서, 문장으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마침표를 찍어줘야 합니다. 시작과 끝이 있어야 단위(unit)로서 성립합니다. 의미는 바로 이 단위에서 가능합니다.
2. 의미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영화 초반에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扮)가 음악 연도를 맞추는 장면이 있습니다. 단순히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캐릭터의 능력인 기억력을 드러내기 위한 장면이 아닙니다. 이 캐릭터가 '의미'를 중시한다는 걸 그의 능력과 함께 드러내는 것입니다. 스트레인지 입을 통해 "그해 그 곡을 어떻게 모를 수 있어?"라는 대사는 두 가지를 모두 나타냅니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를 중시 여기는 캐릭터라는 것입니다. 그의 대사를 "와퍼를 먹는 데 올엑을 안 할 수 있어?", "참새인데 방앗간을 어떻게 지나쳐?"와 같이 생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대사는 아주 짧고, 명료한 데 캐릭터의 이중성을 모두 드러낸다는 점에서 아주 탁월한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이 이중성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의사 스티븐 빈센트 스트레인지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닥터 스트레인지를 다 담고 있지요. 팔머 박사(레이첼 맥아담스 扮)가 "Time will tell how much I love you"라는 문구를 새긴 시계를 선물한 이유,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 扮)이 그에게 본 가능성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3.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가 되기 전까지 그는 자기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바로 곁에 있는데도 결코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1 교통사고 이전의 닥터 스트레인지는 데카르트적 주체에 머물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방식은 과학이다. 과학이란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본다. 딱 이 정도였던 셈입니다. 에이션트 원과의 [만남]은 바로 이 지점을 넘어서게 합니다.
나 자신을 넘어선 석사(master) 아닌 닥터는 안티 도르마무(시간 없음)2를 물리칩니다. [시간 없음; 의미 없음; 가능성 없음; 변화 없음]이 [시간; 의미; 가능성; 변화]에게 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전부는 그 시계뿐입니다. 바로 그 시계 뒷면에 "얼마나 사랑하는지 시간이 알려줄거야(Time will tell how much I love you)"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영화는 닥터가 전면이 망가진 이 시계를 차고서 창밖을 응시하며 막을 내립니다. 시종일관 이 영화는 시간이란 은유를 가져가고, 그 시간이 의미를 알려줄 것이라 말해줍니다. 분절이 의미의 조건이지만 분절된 낱낱이 합해져야 비로소 의미가 됩니다. 바로 그게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 이 글은 클리앙에 게시한 글을 2021년 02월 클리앙에 최초 게시 후 다시 다듬어 올립니다. 이 공간에서 클리앙에 올린 글을 차차 다듬어 올리는 동시에 앞으로 여러 감상문을 올릴 예정입니다.
** 여러분의 라이킷은 다음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됩니다. 라이킷을 먹고 자라는 호덕 올림.
1. 이 내용과 관련해서는 추후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 2014)에 대한 리뷰에서 다루겠습니다.
2. 도르마무 목소리도 닥터 스터레인지 역을 맡은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했습니다. [자신의 최대의 적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