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창업, 사업, 개인사업, 자영업... 이름은 다를지라도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들은 목표 대상에게 작은 생각 하나를 심어서 그로 하여금 원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나 역시 돌이켜보면 어느 날 갑자기 '창업해야지!'라고 결심한 게 아니었다.
과거부터 조금씩 조금씩 창업 생각을 싹 틔워 왔다.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가 창업을 결심한 6가지 이유를 살펴보자.
가장 먼 과거로 올라가자. 지금으로부터 무려 10여 년 전, 학창 시절 ~ 대학교 때 독서가 첫 번째 창업의 첫 요인이다. 책을 결코 많이 읽지 않았다. 머릿속에 비어있으니 오히려 읽는 책마다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는 책 장르도 몰랐을 때니 그냥 베스트셀러나 겉표지 예뻐 보이는 거 샀었다.
기억에 남는 책으로는 <해피어>, <지도밖으로 행군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빅피처>가 있다. 그리고 스포츠 만화책 <메이저>, <휘슬>이 있다. 작품성 같은 건 모르겠다. 그러나 모두 확실한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이다.
이런 마음가짐 때문에 현실에 대한 걱정은 과소평가하고 창업에 대한 욕망은 과대평가해서 빠르게 창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쩔 때는 지금 하고 있는 창업이 힘들어도 "응~ 나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있어~"라고 정당화? 하며 더 버틸 때조차 있는 거 같다.
입시라는 목적을 달성하자 사는 게 심심했다. 뭘 하면 좋을까 하다 축구 선수를 떠올렸다. 늦어도 한참 늦었었다. 주변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교 와놓고 뭔 축구 선수냐고 말렸었다. 누구는 벌써 토익 공부를 한단다.
하지만 이미 "응 나 하고 싶은 거"가 박혀있어서 거의 입학하자마자 그 당시 K3 입단팀에 들어갔다. 그렇게 1년 동안 밥 먹고 축구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개인 운동, 그리고 잠깐 학교 출첵하고 저녁에 팀 훈련, 돌아와서 축구 일기 쓰기가 일상이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앞으로 살날이 있을까 싶다. 운동장 위에 축구공만 보면 살아있음을 느꼈다.
1년을 축구에 미쳐있었지만 입단 테스트조차 받아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넘사벽의 존재들이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한다 할지라도 잡을 수 있는 격차가 아니었다.
이때 지금까지도 유효한 2가지를 배웠다. 하나, 하고 싶은 거 해도 안 죽는다. 그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러다 실패하면 어떻게? 뒤처질 텐데? 지금부터 슬슬 준비해야지"라고 걱정했다. 나 역시 뭔가 다수가 가는 길에서 이탈해 혼자 무언가 한다는 게 무서웠다. 그런데 직접 해보니 그런 건 없다. 내가 1년 동안 뭘 하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잠만 자더라도 아무 문제없다는 걸 직접 경험했다.
두 번째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지' 마인드가 더더욱 강화됐다. 군대 훈련소가 지루할 만큼 축구 훈련이 힘들었지만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아침에 축구 생각에 눈이 절로 떠지고 다음날 축구할 생각에 눈이 안 감겼다. 외적인 조건보다 안에서 오는 만족감이라는 나의 느낌, 나의 생각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책에서만 배운걸 직접 경험했다.
창업도 똑같은 마인드로 생각했다. 이거 하다 망한다고 결코 인생이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10년, 20년 후에 돌아보면 작은 사건중 하나일 거다. 그리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축구 선수 도전할 때와 같이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발표가 좋았던 건지 심심했던 건지 대학교 3학년쯤에 대학교연합 발표동아리 피티피플에 들어갔다. 나도 원래 나서는 성격인데 여기 사람들은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그도 그럴게 애초에 나서지 않으면 이런 동아리도 들어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오히려 학교 생활을 최소한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을 내서 외부 발표 대회에 나가고, 다른 동아리도 동시에 또 하고, 알바도 하고 노는 것도 열심히 놀았다. 그냥 노는 게 아니라 계획을 짜고 사람을 모으고 장소도 섭외하고 후기도 작성했다. 대학 생활이 전부라고 느꼈던 내가 우물 안 개구리로 느껴졌었다.
내가 운영진으로 책임을 지고 발표 대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동아리원뿐만 아니라 외부 청중들, 심사위원까지 초청까지 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세븐일레븐, 길벗 등으로부터 협찬까지 받았었다. 대학교 수업, 책, 유튜브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창업을 <영어회화 학습법> 원데이 클래스로 시작했다. 어떻게? 발표 대회를 그대로 따라 했다. 이미 200명의 사람을 모아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내용만 바꿨을 뿐 홍보 채널까지 똑같이 따라 했었다. 한 번 해봤기에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대학 생활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기에 학교 다니는 와중에 혼자서 강의를 열 생각도 했던 것 같다.
1년 동아리 생활을 마치고 교환학생에 지원했다. 비행기만 타면 되는 상황이었는데 막판에 건강 문제로 가지 못했다. 그때 뭔가 조급했다. 남들 다가는 교환학생인데 나만 뒤처지는 거 아닌가. 특히, 영어회화는 한국에서는 답이 없다는데 하고 걱정했다.
위기는 기회라고 이왕 못 나가는 거 한국에서만 영어회화를 도전해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국내파 치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다. 다들 회화만큼은 해외 경험이 필수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이때부터 국내에서 가능한 영어회화 공부는 다해본 것 같다.
무작정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는 국제학부 수업을 등록했다. 영어회화 스터디도 다닌 것만 50개가 넘었다. 영어 디베이팅 동아리도 들어가고 오죽했으면 '외국인 친구 구함' 전단지도 학교 여기저기 붙이고 다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스스로도 국내파 치고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정은 대실패였다. 열심히 안 해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를 했다. 여러모로 영어회화 학습 생태계가 왜곡되고 비효율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시간도 아까웠지만 남들도 똑같이 낭비할걸 생각하니 답답했다.
이때 지금 하고 있는 창업의 기본 능력과 목표 의식을 길렀다. 나의 시행착오는 남들의 타산지석이다. 해외파가 전할 수 없는 국내파 학습 노하우를 전할 수 있었다. 일종의 차별화 포인트였다. 동시에 내 수강생만큼은 누구보다 효율적으로 영어회화를 공부했으면 하는 사명감도 가졌다. 이러한 문제의식이야 말로 내 창업의 시작과 끝이다.
영어를 계속 쓰고 싶어서 인턴도 외국계만 지원했다. 졸업 전에 인턴 경력은 하나 있어야 취업에 유리할 것 같았다. BOSCH 독일계에서 일했는데 모두 만족스러웠다. 팀에 외국인이 2명이나 있어서 지속적으로 영어를 쓸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부서가 더 많았다) 팀원들도, 동기들도 특히 매일 만나는 사수님도 좋았다.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생각했다. '5년은 하겠는데... 10년까지는 절대 못하겠어' 왜 그랬을까? 일이 재미없었다. 월급 주고 스펙이 되니 열심히 했지 그 이상은 없었다. 직위는 기억이 안 나지만 같은 층에 꽤 높은 사람이 있었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저 정도면 성공한 케이스일 텐데 부럽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앞으로 열심히 하고 성공해도 딱 저기까지겠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인턴 나부랭이가 뭘 알까 싶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그리고 내가 맡은 일은 그랬다. 그래서 취업, 회사에 대한 환상이 모두 사라졌었다. 인턴 후, 졸업 후에 딱히 뭘 할까 생각하진 않았지만 취업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사실, 인턴은 5개월 차까지 밖에 못했다. 그전까지 턱관절 통증으로 고생했었는데 증상이 심해 저서 중간에 큰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취업을 못 하겠다고 생각한 또 다른 이유가 통증이었다. 턱, 목, 어깨 통증 때문에 30분도 제대로 앉아 있지 못했다. 앉아는 있었지만 괴로웠고 집중도 못했다.
그래서 막연하게나마 생각했었다. 나는 몸이 안 좋을 때 자유롭게 쉴 수 있는 직업을 택하겠다. 그럼 일반적인 취업은 거의 안 되겠구나. 지나가다 야채 가게를 봤었는데 야채 장사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앉아있을 필요 없이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그나마 통증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을 거 같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술 후에 상태가 더 안 좋아졌었다. 24시간 통증으로 깨어있는 거 자체가 고통이었다. 미래 커리어가 어떻고는 나와 거리가 먼 얘기였다. 이런 몸상태로는 학교, 일, 결혼은 고사하고 일상생활이 어려웠다. 엄마가 그냥 산에 내려가서 살자고 하기도 했다. 사실 나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조금씩 회복이 됐다. 인생 나락까지 갔다 오니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 뭐든 아픈 거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학점이 어떻고, 연애가 어떻고 그냥 예전보다 아프지 않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나만 아픈 게 너무 억울해서 '나는 무조건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나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래'라고 생각했다. 불공평하게 나만 아팠는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취업 생각은 접었었다.
몸이 좀 나아지고 심심해서 오픽 스터디를 열었다. 영어가 재밌기도 하고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취업 카페에 내가 직접 모임을 만들어서 운영했다. 그런데 오픽 점수와 상관없이 모임을 운영하는 게 재밌었다. 스터디원을 만나면서 과거의 나처럼 다른 사람도 똑같이 영어회화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리더니까 뭐라도 제공해야 할 거 같아서 영어회화 학습 팁을 카톡이나 블로그로 작성해서 공유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바로 이때부터 원데이 클래스 <영어회화 학습법>을 조금씩 조금씩 기획했던 것이다. 내 창업의 시초이다.
원래 같았으면 '나 이제 취업해야 하는데', '안 그래도 늦었는데', '지금 이거 할 땐가?' 하며 고민했을 거다. 하지만 아팠던 게 다행이었던 건지 '다 필요 없고 하고 싶은 거 하자! 그럴 자격이 있어! 고생했잖아!'라고 생각하며 추진했다. 그래서 복학도 최대한까지 미루고 원데이 클래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원데이 클래스가 잘되면서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창업해야지!'라고 결심한 게 아니다. 돌이켜보면 여태까지 해왔던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창업을 좋아하는 아이덴티티가 만들어진 거 같다.
창업 결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은 역시 아팠던 거다. 이렇게 아팠는데 남들과 절대 똑같이 살 수 없지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창업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많이들 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선택했던 거 같기도 하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어떤 이유로 지금의 삶을 살게 되었는가? 여러분의 이야기를 댓글로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