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날(1)

그를 다시 마주쳤고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by 피렌체장탁

이탈리아에 산 지 벌써 8년 차가 되었다.


대부분은 일하느라 혹은 게스트하우스 손님들하고 어울리느라 정신없이 지나온 나날들이지만 그 와중에도 로맨스는 간간히 존재하긴 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지라 본능적으로 한국인들에게 더 끌리고 만날 기회가 더 많긴 했지만 내가 사는 이 땅이 어디인가.


바로바로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로 유명한 이탈리아!!! 청소부와 노숙자조차 잘생겼고 5살 때부터 플러팅 멘트를 장착하고 있다는 이탈리안 가이들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 아닌가!


의도하고 온 건 아니지만 또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편은 아닌 나라서 가끔 좀 멀쩡해 보이는 이탈리아 남자들이 말을 걸면 카페 한 잔, 칵테일 한 잔 기꺼이 함께 하기도 했다.


2022년 2월, 친한 친구 A가 와서 3주간 지내던 중이었다.

A는 나와 동갑이지만 화려한 이목구비에 관리가 잘 되어있는 몸매, 남다른 패션센스까지 누구나 한눈에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친구였다. 그녀와 함께 가는 카페, 루프탑 바, 레스토랑에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길을 나선 참이었다. 둘이서 먹는 저녁인 데다 조그맣고 격식 없는 동네 맛집 같은 레스토랑이었기에 나와 친구는 편안한 후드티에 레깅스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저녁 오픈 시간까지 조금 시간이 남아 그 근처에 있는 프로슈토 바에서 가볍게 아페르티보(이탈리아의 식전주 문화)를 즐기기로 했다. 아르노강을 건너서 나름 핫한 길목에 자리 잡은 그 프로슈토 바는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자리가 없어 늘 와인잔을 가지고 길거리에 서서 마시거나 실내에 들어가더라도 앉을자리가 없는 곳이었다. 친구와 나는 와인 한 잔 정도만 마시고 저녁을 먹으러 갈 예정이었어서 출입문 바로 앞에 바 자리에 서서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눈앞에서 커다란 기계로 바로 썰어주는 프로슈토의 감칠맛과 진한 이탈리아산 치즈와 무화과 잼의 조화에 감탄하며 와인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이탈리아 남자 두 명이 영어로 말을 걸었다. 우리가 서 있는 바 자리가 딱 두 명만 서 있을 만한 공간이었고 이어져서 꺾이는 방향에 그 두 명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ㄴ' 자로 서 있는 마치 처음부터 일행으로 온 것 같은 구도로 자리 잡고 있었다. 내 친구가 무척 예뻤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몇 번 있었던 터라 당연히 또 친구를 보고 말을 걸었겠거니 싶었으나 그나마 이탈리아어와 영어가 조금 더 유창한 내가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왜 계속 나에 대한 이야기만 물어보는 거지?


둘 중 영어를 잘하는 한 명이 계속 나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이는 좀 있어보였으나 인상이 나쁘지 않았고 별로 할 말도 없을 것 같은데 대화가 끊어지질 않았다. 자세히 보니 얼굴은 전형적인 이탈리아 남자인데 눈웃음이 꽤나 귀여웠다. 게다가 이 친구 바다를 좋아하고 보트 세일링이 취미라고 한다.


'오!! 보트를 가진 남자라니..'


조금씩 호감도가 높아지는 찰나에 어디 사는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살던 곳과 같은 건물에 살고 있었다. 친구도 한인 민박을 운영하고 있던 터라 그 건물에 한국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이 남자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사람들이 대문을 잘 못 열어서 내가 여러 번 도와줬었어! 그게 네 친구 집이었구나! 난 너의 친구와 그의 남자친구도 기억하고 있어. 걔네들은 이제 한국에 간 거야?"


오! 맘마미아!!! 역시나 좁은 세상.

우연히 바에서 만난 이탈리아 남자가 내가 맨날 드나들던 건물에 살던 남자인 데다 내 친구들도 알고 있다니...! 반가우면서도 조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랬는지 처음부터 전화번호를 묻지는 않고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어차피 전체공개되어 있는 계정이라는 생각에 알려주었다. 그와 그의 친구는 우리와 잔 더 하고 싶어 했으나 내 친구가 별로 내켜하지 않아서 거절하고 우리는 원래의 계획대로 둘이서 해산물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그가 바로 'Jo(조)'였다.

곧 우리는 데이트를 시작했고 6개월 간 만나다가 내가 잠수이별을 선택하게 되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참으로 단순한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텐데...


일방적으로 잠수를 타고 연락을 차단한 지 6개월 즈음되던 어느 날. 집 근처 마트에서 그와 다시 마주치고 말았다. 한 번쯤 이런 날이 생길 수 도 있다고 상상은 해보았으나 실제로 일어날지는 몰랐던 우연한 마주침. 그날도 나는 밀려드는 손님들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카트를 끌고 산더미 같은 장을 보고 있었고 늘 많은 양의 물건을 사는 나는 계산대에서 눈치 아닌 눈치를 보기 일쑤였다. 뒤에 음료 하나만 든 사람을 보면 괜한 죄책감이 드는 탓에 어느 순간부터 계산대에서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 아마도 내 바로 뒤에 그가 있었던 것 같다. 계산을 다하고 문을 나서기 직전까지 나는 그를 발견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앞에 유모차가 길을 막고 있어 출입문 앞에서 잠시 기다리게 되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는데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있는 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그는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못 보았을 거라고 생각했고 화들짝 놀란 나는 앞에 유모차를 밀치다시피 하고 출구를 빠져나왔다. 아가야.. 미안해...


생각보다 많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고 그저 그의 옆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심장이 쿵쾅쿵쾅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정말로 동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왜 이렇게 동요가 되는지 그야말로 멘붕 상태였다.


'그가 나를 보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야!'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그렇다 치고 집에 돌아와 손님들에게 줄 저녁을 준비하면서도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메신저가 '지이잉지이잉' 울렸다.


'너 너무 나쁘다. 왜 우리가 마주쳤는데 인사조차 할 수 없는 거야? 난 정말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난 너한테 이런 대접을 받을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함께 찍은 사진 이미지를 보낸 후 ) 이것 봐,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렇다. 그는 나를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수이별도 모자라 우연히 마주친 순간에도 도망치다시피 자기를 외면한 나를 보고 정말 화가 났던 모양이다. 헤어진 연인 간에도 쿨하게 지내는 편인 이탈리아 사람이라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왜 갑자기 연락을 끊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해 준 적이 없으니 갑갑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의 의견을 존중하여 크게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었던 그인데 이번만은 참기 어려웠었나보다. 짧은 메시지였지만 많은 감정과 깊은 화남이 느껴졌다. 다시 그와 만나려는 생각보다는 이제와서라도 적어도 나의 행동의 이유는 설명해줘야 할 것 같았다. 미안한 마음에 하루를 꼬박 고민하고 나서 답장을 보냈다.


'안녕, 조! 너를 기분 나쁘게 했다면 정말 미안. 난 그냥 너무 놀랐고 너랑 마주친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어. 너 알고 있니? 우리가 만나는 동안 내가 너를 정말 좋아했었다는 걸. 나는 너의 여자친구, 아니 그 이상이 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때때로 너는 나를 그냥 섹슈얼 파트너 혹은 데이트를 위한 여자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았어. 넌 나를 한 번도 '아모레'라고 부른 적이 없었지. 사실 나조차 내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고 그런 나의 감정을 너와 풀어내기에는 나는 그때 너무 바빴어. 그리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 나의 짧은 언어로 너를 이해시킬 수 있었을까?

나도 알아. 갑자기 너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차단했던 나의 행동이 정말 나쁜 행동이었다는 걸. 넌 나한테 늘 잘해줬고 행복했던 기억도 아주 많아. 그래서 너한테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다만 우리의 타이밍이 나빴던 거라고 생각해. 네가 행복하고 잘 지냈으면 좋겠어.'


' 너 장난하니? 난 네가 그런 생각하는지 정말 전혀 몰랐어. 나는 너를 정말 아끼고 좋아했기 때문에 너한테 잘해준 거야. 다만 네 말처럼 작년에 너와 내가 너무 바빴고 말 그대로 미친 해였지. 나는 밀라노와 피렌체를 오가면서 일하기에 바빴고 나 자신은 물론 내 소중한 것들 어느 하나도 챙기지 못했어. 우린 큰 실수를 한 거 같아. 너와 나는 그런 주제로 좀 더 많이 자주 이야기 했어야 돼. 난 너를 결코 단순한 섹슈얼 파트너로 생각한 적이 없어. 네가 사라졌을 때 난 너무 상처받았고... 난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볼 수도 지울 수도 없었어. 하나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난 네가 너무 그리워. 메시지에 답해줘서 너무 고마워. 내 마음이 다시 따뜻해졌어.'


'내가 그렇게 널 떠났는데도 내가 아직도 그리워?'


'응, 너무 많이.....'


이렇게 다시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내보려고 한다. 조금씩 쓰다 보면 이 관계가 좀 더 명확하게 보이리라는 기대를 안고서. 이 이야기의 끝이 사랑일지 아니면 더럽게 이해할 수 없는 한낱 국제 연애 기억의 조각으로 남을지...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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