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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Apr 21. 2024

그럼에도 다시 한번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그래.. 그 미련한 여자가 바로 나다!


 친구가 연애상담으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100번은 쌍욕을 날리며 정신 차리라고 했겠지만 결국 내 감정 앞에서는 한 치 앞도 못 보고 굴복해 버리는 그런 여자.


 3주가 넘는 시간을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지만 밴쿠버에서 다시 만난 J의 앞에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내가 너무 그리웠다 말하며 달려오는 그의 모습 앞에서 나는 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와의 뜨거운 포옹 한 번으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사람을 떠날 수 없어.'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미움, 분노, 배신감 이런 감정이 더러 치솟아 오르기도 했지만 아직은 사랑과 그리움이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다시 자기 합리화를 했다.

어차피 몇 주 뒤면 J는 한국에 갈 거니까 그때 다시 마음 정리하고 자연스럽게 헤어지면 되겠지...


 그래서 어쩌면 다른 때보다 더욱더 순간의 내 감정과 욕구에 충실하게 시간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귀던 중 어떤 기간보다도 J 또한 나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것 같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은 늘 하트였고 그 어느 때보다 나를 배려하고 아껴주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밴쿠버의 그 여름은 그래서 너무 행복했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 라 할 수 있을 정도...


 나는 애초에 캐나다에 남아 자리 잡고 계속 살고 싶어서 이민까지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학 졸업장을 따려면 한 학기가 남아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대학 졸업장보다 내 인생의 행복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캐나다니까 여기서 잘 자리 잡을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를 보기 위해 밴쿠버에 갔을 때도 나의 대부분의 짐은 캘러리에서 같이 살던 친구들에게 맡겼었다. J가 한국으로 떠나고 나면 다시 캘거리로 돌아가 취업을 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보내던 그 시간이 마지막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예상치 못한 몇 개의 사고가 터졌다.


 이 에세이에 가볍게 언급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몇 가지 일과 이유들로 결국 내 생각보다 빨리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다. 얼마나 급작스러웠냐 하면 비행기표를 바로 끊느라 초밥집에서 일하며 모아뒀던 얼마 안 되는 돈을 꽤나 탕진하였다. 캘거리에 놓아두었던 짐을 찾으러 갈 새조차 없어 친구들에게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고 버릴 건 버리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J 가 한국에 간 지 3주 만에 귀국했고 우리는 다음 학기를 같이 다니게 되었다.


 나에게는 마지막 학기였던 4학년 2학기.


 표면적으로는 아주 괜찮았다. 대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는 여유로웠고 친구, 후배 그리고 남자친구까지 있는 평안하고 즐거운 학교 생활이었다. 내가 돌아오자 우리 엄마를 비롯한 가족, 친구들은 아주 신이 나서 행복해했고 J도 이제야 나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듯이 무척 잘해주었다. 그러나 내 안은 말도 못 하게 곪아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 캐나다에서 더 지내고 싶었고 좋은 취업기회도 있었는데 놓쳤어. 아직도 J에게 그 일본 여자친구에 대해 묻지도 추궁하지도 못하고 모른 척하고 있어. (말할 수 없는 그 사건)을 생각할수록 잠도 안 오고 눈물만 나. 내가 뭐 얼마나 더 잘 살려고 이런 선택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뭔가 확실히 잘못된 가고 있는 것 같아. 이런 마음으로 내가 잘 살 수 있을까?'


 제일 큰 문제는 나의 이런 곪고 있는 마음의 원인 제공자이자 어쩌면 제일 가까운 존재였던 J가 이런 나의 상태를 전혀 몰랐을뿐더러 나 또한 이런 내 속을 전혀 털어놓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존재가 가장 멀리 있는 느낌. 그걸 알면서도 차마 놓지는 못하는...


 상황이 안 좋아질수록 그와의 헤어짐은 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까지 놓아버리면 내 인생에 남는 것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는 것이 나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많은 것을 놓쳤으니 이 놈이라도 내 곁에 남아있어야 한다는 보상심리. 그리고 그가 없으면 정말 나는 아예 아무 의미 없는 존재가 돼버릴 거라는 두려움. 그를 사랑하는 절대적인 나의 사랑만이 내 존재의 의미를 채워주는 것 같은 맹목적인 믿음... 이런 것들이 나를 지배했다.


 취업준비다 뭐다 바쁜 동기들을 보면서도 나는 텅 비어버린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보다는 J에게 집중했다. 허무하고 힘들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어찌 보면 집착일 정도로.

 

내 과제보다는 그의 과제를 도맡아서 도와주었고 같이 들었던 교양이나 전공의 조별과제가 있으면 꼭 같은 조를 꾸려 내가 다 준비한 다음 그에게 발표의 기회를 주었다.

 

 어느새 우리는 교수님들도 인정하는 잉꼬커플이 되어있었다. 빨리 헤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지낸다며 이젠 부럽다는 친구들까지 있었다. 그런 소리를 들을수록 그 관계에  대한 집착이 심해져만 갔다.


 그 집착만이 나를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한 번 일이 터졌다.

여느 때처럼 조별 과제를 위해 PPT를 만들며 밤을 새우고 있던 밤이었다. 그가 보냈다는 자료가 열리지 않아서 그의 이메일로 직접 들어가겠다는 허락을 받고 로그인하였다. (솔직히 트라우마가 있어서 다시는 그의 어떤 계정에도 접속하고 싶지 않았다. )

그리고.. 참.... 타이밍도 야속하게.... 하필 내가 접속한 그날에.. 그녀의 메일이 다시 와있었다.


'Oppa, I WILL GO TO KOREA SOON'


 하......................................

이걸 내가 또 봐야 한다고? 내용인 즉 친구들과 한국여행을 오기로 했는데 잠시라도 J를 볼 수 있냐는 것이었다. 진작 헤어졌지만 그래도 한국에 가는 이상 오빠가 보고 싶다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메일에 대한 답장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전에 주고받은 메일이 있나를 속절없이 검색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다신 보지 않겠노라 결심하고 참았지만 그 메일 제목 앞에서 피어나는 의심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간의 내용은... 그 일본여자분은 왜 갑자기 헤어져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해 답장을 했지만 내가 보낸 메일의 내용(헤어지자)을 모르는 J는 어리둥절해했다.


 다만 어차피 나랑 다시 잘 되어 만나기 시작했고 그 여자한테 미련이 없었던 그는 정확한 내용이 파악은 안 됐지만 헤어지는 게 맞긴 하니까 그냥 그 흐름대로 헤어지자고 마무리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둘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가 하필 그녀가 한국으로 여행을 오게 되어서 다시 메일을 보낸 시점에 내가 그걸 보게 된 것이었다.


 사연이야 어쨌든 그걸 다시 보게 된 나의 눈은 거의 반 돌아버렸다.


조별과제를 위해 밤새다시피 한 새벽 3시였다.


이번엔 진짜 용서할 수 없어!!!!!!!!!!!!!!!!!!!!!!!!!

내 기필코 이번에는 너와 헤어지리라!


그리고 다음 날 그를 만나자마자 물어봤다


"자기, 무쯔미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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