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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렌체장탁 Apr 22. 2024

결국 내가 그의 손을 놓아버렸다.

나를 쓰레기 취급 하는 너의.

 "너 나랑 같이 하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그게 내가 그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자 기회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26살의 어리디어린 자기 앞가름 하나에도 정신없었을 시기의 그에게 가혹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겠으나 당시에 나는 정말 심각했다. 그 많은 일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텅 빈 눈과 차가운 말들에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는 전혀 그런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 말을 뱉게 되기까지도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날 새벽 '무쯔미'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 그는 다소 당황하긴 했으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냥 일방적으로 연락온거지 난 만날 생각 전혀 없었어. 친구야 친구. 캐나다 어학원 때 조금 친했던. 그리고 걔도 자기 친구들이랑 오는데 만났어도 잠깐 밥이나 먹고 가이드 역할이었겠지."


"나 얘 누군지 알아. 너랑 사귀었었던 사람 아니야?"


"아.... 그건.. 사귄 것도 아니지. 그냥 얘가 나 좋아하고 그랬던 거야. 심각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때 우리 헤어졌었잖아."


"아.. 우리 헤어지고 나서 만난 건 맞아? 이 사람 때문에 헤어진 건 아니고?"


 그간 참아온 시간이 무색하게도 눌러왔던 의심과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이 이메일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왠지 나를 속이고 그녀를 만나러 갔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에 대한 미련이 있다기보다는 정말 별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학연수 시절에 만났던 나를 좋아했던 일본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무쯔미도 나도 불쌍할 지경이었다.


  물론 단 둘이 만나는 것도 아니고 친구라는 명목하에 서울까지 온 그녀와 밥 한 끼 먹는 시간을 내가 간섭할 순 없었다. 다만 그녀에 대해 알고 있음을 밝혔음에도 나를 속여왔던 시간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네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기엔 나는 속으로 참 많이 상처받았었단 말이다.


 이렇게 또 그녀의 이름을 들을 줄 알았더라면 이 일을 알게 된 그 즉시 그에게 말을 하고 화를 내고 관계를 정리했어야 됐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었다. 시간이 너무 지나버렸기 때문에 그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대처를 했고 어떤 마음으로 너와 함께 하고 있었는지 구구절절이 말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이쯤 되면 다들 아시겠지만 그 일도 그의 짧은 사과와 함께 그냥 지나갔다.


 화도 내고 표현도 해봤지만 어차피 헤어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력했다. 그렇게 사랑인지 집착인지 모를 감정에 휩싸여 한 학기를 보내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의 고향으로 같이 졸업여행도 떠났다. 자꾸 즐거운 일들을 만들다 보면 괴로운 기억들은 묻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태도가 그를 기고만장하게 만들었을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대해 지나친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내가 그를 버릴 수 없다는 확신.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순 있어도 나는 절대로 자기를 버릴 수 없다는 그런 확신 말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아주 조금씩 조금씩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졸업은 한 나는 마지막 학기에 취업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급하게 정보들을 모아 상반기 공채에 지원하고 있었고 결과는 당연하게도 서류광탈이었다. 대기업이 아니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재미있어 보이는 일이라면 작은 회사에도 다 지원했었다. 그중 '웨딩플래너'라는 직업에 흥미가 생겨 지원했던 청담의 유명한 디자이너샵에 합격도 했었으나 자신을 밟고 출근하라며 현관 앞에 드러누워버리신 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사실상 캐나다 정착이 좌절되고 한국에서 취업 준비를 하게 된 현실 자체가 불만이었던 나는 그다지 취업에 대한 열정이 없었고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서 자소서 쓰는 척을 하다가 헬스장에 가서 몇 시간 운동하고 나와서는 배고프다는 핑계로 친구를 만나 밥보다는 술로 배를 채우는 것이 일상이었다. 새벽에 술에 취해 들어와서 오전 내내 자고 있는 딸의 모습이 한심해 보였던 어머니의 구박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모녀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3월부터 6월까지 기껏해야 3-4개월이었다. 내가 백수로 지낸 기간말이다.

고3 수능이 끝난 직후부터 대학시절 그리고 외국에서 생활하던 모든 기간을 통틀어 나는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나름 용돈이나 생활비는 내 선에서 충당하려고 노력했다. 자소서도 종일 붙들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공채일정에 늦지 않게 지원은 하고 있었다. 걔 중 몇 군데는 최종면접까지 가기도 했었다. 내 입장에서 나는 다른 때보다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적어도 꾸준히 계속해나가고 있는데 초조함 때문인지 부모님과 주변사람들은 자꾸만 날 재촉했다.


 이런 때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J라고 생각했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내 곁에 오래 있어주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존경하고 칭찬해 주는 사람. 그게 내가 그를 놓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J는 내 편이 아니었다. 늘 어머니의 편에서 이야기하면서 나를 같이 구박하기 시작했다.


 "아니, 자기는 잘 알잖아. 나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어. 그리고 사실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거짓말로 자소서 쓰는 것도 너무 괴롭고 의욕도 안 생겨. 겨우 흥미 생겨서 도전해보고 싶다고 지원한 웨딩플래너도 엄마가 자기 성에 안 찬다고 못 가게 했잖아. 솔직히 내 인생인데 그냥 남들 다 한다고 따라가는 게 맞나 싶어.  그리고 취업하겠다고 하루종일 붙들고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또 일 시작하면 친구들도 잘 못 만날 텐데 지금이라도 많이 보고 같이 시간 보내고 싶기도 하고 사실 걔네랑 하는 대화에서도 여러 자극도 많이 받아. 놀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도서관 가거나 스터디하면서 진로탐색도 하고 있고. 그러다 결국 술 한잔 하게 되긴 하지만 내가 큰돈 쓰는 것도 아니고 하루에 만 원도 안 써. 내가 뭐 잘못하고 있는 거야? 이제 3개월 지났는데..."


"어. 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했어야지. 맨날 술 먹고 그러고 다니는 거 솔직히 한심해. 내가 좋아하던 건 뭐든지 잘하고 열심히 하는 너였는데 요새는 좀 실망스러워. 너 쓰레기 같아."


"뭐?? 야!!! 사람이 어떻게 한결같이 열심히 하냐. 나도 이런저런 일 겪고 나서 휴식도 좀 필요했다고. 근데 한국 오자마자 졸업하라고 바로 복학하고 졸업하고 나니 바로 취업하라고 해서 하고 있잖아. 내가 뭐 안 하고 있어? 그럼 넌 늘 상황이 좋을 때만 날 사랑할 거야? 내가 힘들어서 잠시 망가져있다고 바로 내가 싫어져?"


"어. 난 늘 좋은 모습만 보고 싶어. 널 존경하고 싶어. 이런 모습은 보기싫어."


"내가 힘들어하면 곁에서 의지도 돼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너도 늘 좋은 모습만 있는 건 아니잖아.

(넌 나보다 한 살 더 많으면서 이제 3학년이잖아. 그런 현실에 징징대고 힘들어하는 너 보면서 난 한 번도 뭐라고 한 적 없이 힘들어하면 도와줬었잖아!!!)"


"모르겠어. 그냥 요즘의 넌 좀 별로인 것 같아. 내가 존경하던 그 여자가 아니야"


"우리 앞으로 같이 지내면 지금보다 더 힘든 일도 어려운 일도 많이 생길지도 몰라. 그럼 그때마다 내가 약한 모습보이면 넌 내 탓하고 날 한심해하면서 욕할 거야? 같이 뭔가 해결해 볼 생각이나 그냥 내 마음 들어주면서 위로해 줄 생각은 전혀 없고?"


"그건 그때 돼 봐야 알겠지. 아무튼 지금의 넌 한심한 게 맞아."


"너.. 나랑 같이 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어? 우리 같은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무슨 미래? 아니.. 난 생각해 본 적 없어. 지금 해야 되는 일들 생각하고 하는 것만으로 벅차."


"아... 알겠어..."


 내가 한심했던 것도 맞고 모든 게 핑계였고 그냥 놀고 싶었던 것도 맞다. 그래도 세상에 단 한 명 그런 시기의 나도 조금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J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동안 그를 계속 붙들고 있었던 것도 너무나 당연히 그와 함께 하게 될 미래에 대해 조금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니.... 당시 나에게는 그 한 마디가 너무 충격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참고 견디면서 네 곁에 남아있던 시간들은 다 의미 없는 거였어? 아니... 참고 견뎠다는 거부터가 웃기다. 언제부터 연애가.. 사랑이 참고 견뎌야 하는 거였었나.


 그냥 얼굴만 봐도 설레고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웃음이 터지고 손 끝만 닿아도 온몸이 벌겋게 달궈지고 눈만 마주쳐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보고 싶어서 가슴이 아파서 밤새 울던. 세상 모든 연인들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의 이야기만은 특별한 에피소드가 되어 반짝반짝 빛나던.


 그런 내 사랑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람피우는 것도 괜찮아. 나를 속이는 것도 괜찮아. 하지만 나를 쓰레기 취급하면서 나와 미래를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너는 괜찮지 않아.


 그렇게 결국 내가 그의 손을 먼저 놓아버렸다.


그게 맞나? 사실은 네가 진작에 놓았던 손을 혼자서 붙들고 붙들고 다시 붙들고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런 온기도 남아있지 않았던 그 손을.


 하루를 꼬박 울다가 문자를 보냈다.


내가 보낸 문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의 답장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래. 알겠어. 잘 지내. 근데 네가 앞으로 나보다 더 잘난 남자는 만날 수 있어도 나보다 더 잘생긴 남자는 만나기 힘들 거다.'


 아...... 뭐냐.

내가 그렇게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자기보다 잘생긴 남자는 못 만날 거라는.. 하하하.


 저런 사람을 여태 붙들고 있었구나. 그냥 웃음만 나왔다.

21살 어린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26살 허무함으로 끝난 나의 사랑. 안녕안녕.





비하인드.

헤어지고 얼마 뒤 나는 대기업에 취뽀하였다.

그가 그렇게 바라던 대기업 다니는 여자친구가 돼버린 것.

참 사람 한 치 앞도 못 보고... 그렇게 산다. 조금만 더 믿어주지 그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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