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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Dec 06. 2023

탈출구가 필요해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과 필연의 열매다   - 데모크리토스

1.

우연한 사건의 배경에는 반드시 필연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고 가정해 본다. 전혀 생각지 않은 일이 일어났고, 그 사건을 물 흐르듯 그냥 따라가다 보니,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 둘 찾게 될 때 당사자는 놀랄 수밖에 없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호기심으로 별생각 없이 시작한 이민을, 처음에는 한 번의 이사쯤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하나 둘 구체적으로 진행이 되면서, 수많은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이별이  조금씩 눈에 보였다. 동시에, 그 많은 것을 버리고서라도 이민을 강행해야겠다는 의지가 살아났다..


직장 10년 차 과장이었을 때만 해도 남들이 다 힘들어하는 IMF 후폭풍은 내게는 다 남의 일이었다. 뉴스에서나 IMF를 떠들었다. 한국에 있는 여러 외국계 기업 중 특별히 튼튼했던 회사는, 여전히 튼튼했음에도 자금 절약을 위한 변혁과 다운사이징에 한창이었다. 그 몇 년 전 세상은 조금씩 인터넷 시대가 되어갈 때, IT 기술의 선두에 섰던 회사는 국내 최초의 재택근무를 시범적으로 시행했다. 동시에 3-4 차례에 걸친 명예퇴직 바람이 불었다. 그때 자발적으로 응했다면, 몇 년치 급여를 더 받을 수도 있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좋은 기회가 다 지난 후에, 이민 설명회에 우연한 기회에 참석했고, 그날 즉시 영주권 신청서를 제출하고 얼마후 자발적 퇴직을 함으로써 "돈과는 먼" 스스로를 확인하고 말았다.


영주권이 나오기까지는 신청일로부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4년도 걸리는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인터뷰 절차에 따라  더 늦어질 수도 있었다. 미리 신청한 선배들은 거의 대부분 인터뷰 면제라는 행운을 누렸다. 영어 사용 경력에 유리한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 역시 동일한 이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 면제? 나 역시 그렇게 되리라는데 별 의심은 없었다.


그러나, 영주권은 속 타게 느렸다. 그동안  나는 회사 발령으로 서울에서 전라도 광주 영업 지사로 내려갔다. 외국 이민의 크나큰 이사를 먼저 체험하는 듯한 기회가 되었다.


아내는 신혼 이후 시아버지의 까다로운 성격으로 정신적 고통을 많이 받았었다. 그 결과 태어난 첫 아이는 불안 증세가 심해 까물어치게 우는 날이 많았다. 태중에서의 10개월 동안 산모의 상태에 따라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나중에 실감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님과 아내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아내 편을 들어주지 못한 나의 부족함은 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낮은 자존감


아버지는 두 가지 면에서 내가 닮고 싶지 않았는데, 그 첫 번째가 낮은 자존감이다. 


서울로 가족을 데리고 올라오셨을 때, 나는 겨우 7살이었다. 부랴부랴 상경을 결정한 이유로, 큰 누나가 고향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남은 자식은 살리자는 목적이셨다. 


아버지의 낮은 자존감에 대한 짧은 에피소드가 있다. 결혼 후 나는 회사에서 돈 500만 원을 융자해 단칸방을 세 얻어 살게 되었다. 신혼방을 꾸미는데 부모님의 재정적 도움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갖추어진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사정을 아신 장인어른께서 커튼 등 필요한데 쓰라고 돈을 보내주셨다. 문제는, 이 사실이 아버지께 알려지자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셨다. 가난하다고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오해하신 것이다.


가난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격과 기질, 그리고 생각까지도 변형시키는 힘이 있지 않나 싶다. 가난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이 성격적으로 비뚤어진 경우를 보았다. 아버지의 경우가 그랬다.


상경 후 몇 년 간 이발사로 생업을 꾸린 아버지는 그 일을 관두고 다른 일을 하셨다. 공문서 및 소송 서류 작성대행 업무였다. 농수산물 시장 상인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이 일은 그전과 다른 수입을 아버지에게 가져다 주었지만 단점이 있었다. 수입의 대부분이 차후 정산이었다. 그래서 가끔 밀린 대금 받는데 애를 태우신 것을 종종 목격하곤 했다. 


아버지는 돈을 한때 남 부럽지 않게 벌어도 어머니에게 한 푼 맡기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어머니는 늘 생활비를 그때 마다 구차하게 타 쓰시곤 하셨다.


왜 가락동 상인들은 정식 법무사를 고용해 일을 처리하지 않고, 수소문으로 알게 된 아버지를 찾았을까? 상인들에게는 비용이 승소와 함께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소송과 관련된 모든 것은, 변호사 비를 포함하지 않아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비용이 저렴하면서 실제적인 효과는 다르지 않은 서류작성을 위해 아버지는 그렇게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인사였던 것이다.



체면과 허세


아버지의 또 다른 면모, 체면과 허세.


이 체면은 내 식구 내 집안 보다 외부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는 유혹이다. 어머니나 자식에게는 용돈 한번 주지 않아도, 작은아버지와 조카들에게는 엄청 후했다는 것이다. 며느리에게 용돈 주기에 인색한데 비해, 전혀 외인인 옆 집 새댁 아기에게 용돈을 주기도 했던데는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체면이 확장되다 보니, 거의 일주일에 한 번은 집에 들어올 떼 한아름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육교나 전철역 좌판을 지날 때면 필요도 없는 손톱깎이, 양말 등의 싸구려 물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주었다. 그들을 도와준다는 마음과 더불어 많은 물건을 사주는 후한 사람으로 보이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1979년 여름에 우리 집은 서울 이문동에 있는 2층 짜리 빌라로 이사를 갔다. 10여 채가 1, 2층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우리 집은 2층에 있고, 재례식 변소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최악의 구조로 된 건물이다. 그러나 그 집은 그전에 살던 반지하보다는 사정이 괜찮았는데, 영화 기생충에 나왔던 집처럼 비가 오면 집안에 하수구 물이 역류해 오물과 악취가 심했는데, 그곳보다는 조건이 좋았다.


그런데 이곳에 이사한 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시작된 불행은 욥의 그것과 맞먹을 만큼 매서웠다.


아버지는 이곳에 온 시기에 제약회사 외판원을 했다. 어느 날 가짜 건강식품 파동이 일어났고, 아버지는 대대적 단속에 걸렸다. 혐의에 오해를 받고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지내고 있었고, 누나가 죽은 후 겨우 반년 정도 지난 후다. 이 일 후 2년 동안 가정에 닥친 불행은, 가히 성경 욥기의 저주만큼 가정을 초토화시켜 버렸는데, 더 무서운 사실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나는 운명을 달리했다. 까탈스러운 중학교 3학년 누나는, 그날도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다가 분노를 참지못하신 아버지의 폭력에 심장마비가 왔다. 기절하여 침을 흘리며 쓰러진 이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 광경을 어찌할자를 모르며 목격하던 나의 귀로 올리비아 뉴튼 존의 "Let me be there"가 배경 음악으로 들려왔다. 공부한다고 늘 음악을 틀어놓던 누나의 요구대로 음악은 제 역할을 그 시간에도 감당하고 있었다. 단지 그날 이후 그 죽음의 암시같던 가사의  노래를 도무지 나는 듣지 않으려 했다,



                                 Olivia Newton-John - Let Me Be There -July 28th 1973


그리고, 아버지는 무사하셨다. 딸을 죽게한 아버지가 아니라, 심장 발작으로 죽은 딸로 사건이 종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일 이후 큰 죄책감은 평생토록 아버지를 괴롭혔을게 분명하다.


어머니는 시간만 나면 앨범을 찾으셨다. 딸 사진이라도 보는 것으로 작은 위안을 삼으셨는데, 당시 나는 어머니의 계속되는 슬픈 모습이 사진 때문이라는 생각에, 누나 사진이 담긴 앨범을 다 태워버려서 현재의 누나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2)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액운이 가정을 뒤덮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서대문 충정로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내게 어느 날 교무실로부터 호출이 왔다. 외부로 부터 온 전화가 나와 통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했다. 그 누구도 교무실로 나를 찾아오거나, 더더군다나 전화를 받을 일은 없었는데, 이 호출로 가슴이 내려 앉았다.


"동생이 학교에서 싸우다가 쓰려졌는데 의식불명이야. 형이라 전화했는데 와 봐야 할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수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많이 다쳤다는데, 죽은 것은 아닐까?

괜찮을 거야, 건강한 놈이었으니.

이 말을 엄마에게 어떻게 알리지?


버스는 느리고, 차창 밖에서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의 웃음은 공허했다.


동생은 패싸움을 했다. 싸움 중 넘어져 뇌진탕으로 쓰러져 의식을 잃고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직 감옥에 있었다. 동생의 장례는 졸속으로 병원에서 훌쩍 끝내버렸고, 어떤 연유였던 동생과 싸우다가 죽게 한 친구는 소년원으로 갔다. 이렇게 우리 모두는 각기 다 다른 길로 가버렸다. 나는 이제 어머니를 책임져야 할 사명을 진 젊은 가장처럼 어깨만 무거워졌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6개월 뒤에야 출소해 집으로 왔지만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나의 십 대는 슬픔에 지쳐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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