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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Dec 13. 2023

포기 각서

똥 밟은 자 그것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다.

포기

드디어 영주권이 나왔다. 이제 1년 내로 영주권을 준 나라에 발을 디디면 된다. 영주권이 무슨 자격증 같이 느껴지던 시대에 나도 그 대열에 끼인 것이 기분 좋게 여겨졌다.


그런데, 간사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막상 최종 결정이 되니까 슬슬 목적에서 비껴가는 나의 마음이 그랬는데, 모든 것으로부터 헤어진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이제야 뒤돌아 보게 된 부모님의 마음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시골에서 병으로 죽은 큰 누나를 포함해, 둘 째 누나와 나의 남 동생 등 자식 세 명을 잃으신 분들이다. 농담 같은 현실이 바로 나의 가족의 삶이었다. 내가 감히 함부로 떠나고 말고를 결정할 자격이 없어 보였다. 외국에 가서 살아도 자주 왕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큰 아들까지 잃게 되는 것이다. 


IT업계에서 남의 부러움을 사고 있던 직장을 놓고 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비록 많은 선배들이 이 회사를 떠나 외국으로 향했다는 사실로 나의 진로를 결정지을 수 없었다. 경제적으로 좋은 직장,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으로, 영주권과 이민은 관심에서 쑥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한 사건이 생겼다. 이 모든 걸림돌을 한 번에 털어버릴, 아주 작지만 중요한 일이 생긴 것이다. 




포기 각서, 특히 '신체 포기 각서'라는 말이 요즘은 친근하기까지 하다. 이미 우리는 사회적인 전반의 대상들을 직접 경험치 않고도 대강 알 수 있게 되었는데, 깡패의 세계를 가보기도 하고 마약 밀거래 조직의 내부를 보기도 한다. 영화와 드라마의 공이 크다. 이런 유의 영화에서는 또 여지없이 사람의 장기를 밀거래하는 암흑가가 배경으로 나온다. 스토리 전개 자체도 뻔할 만큼 익숙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그렇다고 그렇게 달가운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대학 다니던 어느 해 글쓰기 모임의 주제를 "포기"로 주고 떠오르는 것을 자유롭게 써보라 했다. 당시의 포기는 순진했고, 글 쓰는 이의 번뜩이는 광기를 볼 수 있었다. 소설가적 상상이 기지를 발휘하는 20대 초, 그때도 이미 사회의 암울한 구석을 논하고 있었다. 재산권 포기, 양육권 포기, 가정 포기, 욕심의 포기, 진학의 포기, 상속 포기, 기타 등등의 포기가 배추 포기처럼 등장했었다.

'포기'는 고통과 희생의 뜻을 포함한다. 누구나 거부하고 싶은 내부적 압력이다. 

포기를 선언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딱 한 부류의 사람이 있긴 하다. 종교인! 언제나 자신과 싸우며 정결한 영혼을 간직하려는 소수의 사람들을 존경한다. 두 손아귀에 쥐고 있던 것을 풀어 버리는 것, 입에 이미 물고 있는 먹이를 뱉어내는 것만큼 아쉽고 안타까운 일은 없을 텐데도 말이다. 

참, 여기서 잠깐 다른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포기의 훈훈한 예화 하나가 있다. 2020년에 가수 나훈아 씨가 정부의 문화 훈장을 사양한 일이 세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가 하도 잘 나서 객기 부리는 거절이 아니라, 따뜻하고 구수한 의도에서 나온 거절이라 오래도록 남는 그런 이야기다. 

"세월의 무게도 무겁고 가수라는 직업의 무게도 엄청나게 무거운데 훈장을 달면 그 무게를 어떻게 견디냐. 술도 한 잔 하고 실없는 소리도 하고 살아야 하는데 훈장을 받으면 그 값을 해야 하니까.”

받아도 당연히 괜찮은 떡을 거부했다. 어쩌면, 받았을 때 가져올 부담스러운 의무를 거부한 것이다. 이 상대적인 두 가지의 가치들이 서로 바꿀 만큼 무게가 비등한 지는 알고 싶지 않다. 단지, 포기에 따른 플랜 B는 어떤 형태로든 모든 이에게 준비되어 있겠지 한다. 내게도 포기로 인해 큰 것을 버리고 작은 떡에 만족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캐나다 이민 영주권 신청이 들어가고 그다음 단계가 인터뷰였지만 내심 면제를 바랐다. 면제가 당시 흔했다. 만약 생략된다면, 전체 진행 절차 중 중요한 한 단계를 생략된다면 영주권은 더 일찍 나올 것이다.


분명한 김칫국 마시기였으나 거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 이전의 전례 때문이다. 직장 동료나 선배들이 꽤 많이 면제 딱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얼마 후 인터뷰 소환 통지를 받았다. 


인터뷰를 해야 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턱없이 부족한 통장의 여유 자금이었다. 은행 거래 명세서를 제출했고 이것을 근거로 대사관에서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그 때의 생각으로, 가난과 돈이 언젠가는 걸림돌이 될 줄은 알았다. 이 사회는 열심히 사는 것 가지고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기 마련이다  흙수저로 태어나 금수저를 아들에게 물려주려는 생각은 누구나 한다. 꿈은 좋은 것이고, 가난이 사람으로 하여금 열심히 살게 해주는 힘이 있다.


어떤 강력한 벽을 깰 수만 있다면 그 뒤편에 숨겨진 보물을 주워 담겠지만, 그 황금 확률은 극히 소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도 꿈을 꾸는 것은 젊을 때의 특권이다. 나름 잔고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있게 보이려 있는 것 없는 것 끌어다 부풀리기를 했는데도, 없는 것을 특별히 있게 보이게 하기는 어려웠다. 꿈이라도 꾼 것에 족해하며 인터뷰 소환에 응했다.




그들이 인터뷰를 통해 심층 심사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캐나다는 복지가 잘 되어 있는 나라 중 세계 상위다.


일단 누구든지 영주권자로 받아들이고 나면, 나라는 그를 위해 많은 혜택을 예약한다. 18살 이하 자녀가 있는 가정엔 매달 Child benefit이라는 우유값을 준다던지, 수영장, 체육관 등 공공 시설물을 무료로 이용하게 해 주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일정한 보조금이 주어진다. 심지어 동냥을 하는 빈민층에게도 매달 웰페어 (welfare)라는 기본 생활 보조 수당을 지급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제도에 빌붙어 밥그릇만 축낼 것으로 예상되는 일가족 몇 명이 더 늘어나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도주의가 강한 캐나다에서 2000년-2003년 동안 부모 및 가족 초청이 쉬웠던 몇 년이 있었다. 떨어져 살아가는 가족에 대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다. 영주권을 받은 사람이 다시 가족을 초청할 수 있게 한 프로그램인데, 그 기간 동안 유입된 이민자의 30%가 이 제도를 통해 유입된 노인들이었다. 결국, 노인들에 대한 재정적 부담을 나라가 고스란히 떠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제도를 부랴부랴 바꾸어 초청자 스스로가 자신들의 부모를 부양하도록 했다. 바뀐 제도가 시행되면서 나라의 부담은 크게 줄었고, 초청자는 상당한 개인 수입을 증명해야 하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인터뷰는 기준선에 못 미치는 “돈”의 화두를 떠나 한 인간의 가능성에서라도 뭐 건질 게 있나 볼 차례였다. 이도 저도 아니면 버려지겠지만 말이다.


인터뷰의 목적은 영어실력과 개인적 재능을 보기 위해서지만, 세태를 뚫고 나갈 깡을 확인하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영어 실력은 질의와 대답을 통해 확인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영어를 여러 환경에서 친숙해져 있는 터라 이날 인터뷰에서 막힘이 없었던 것은 다행으로 생각한다. 컴퓨터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이랄지 비교적 젊은 나이가 점수를 보탰다. 그리고, 심사관은 내 눈빛을 집중했다. 자격증 하나 더 추가하듯  캐나다 영주권 신청을 했는지, 진짜 그곳에서 뿌리내리고 싶어 하는지... 그렇게 인터뷰는 30여분 진행이 되었다.



궁극적인 영주권 통보를 받는데 또 다른 1년을 기다려야 했다. 종이 한 장의 어설픈 프린트물로 된 영주권이라는 것, 받아보면 참 우습다. 좋으면서 갑자기 두렵다. 받은 날로부터 7개월 정도의 Landing 기간( 캐나다 입국을 마쳐야 하는 최종일)의 데드라인이 있어 이 역시 상당한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주어진 이 일정을 잘 지키고도 모든 일이 후퇴하는 경우도 있는데, 나의 랜딩과 캐나다 답사는 이례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주권을 포기코자 결정한 사건이다. 그리고, 그 배경은 부모님의 슬픔이었고, 현재의 삶에 대한 안주라는 피하기 힘든 두 가지 압력이다. 


이런 일시적인 결정을 하고 나서 마음의 안정을 톡톡히 가져왔다.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신선한 느낌 바로 그것이다. 익숙한 것이 얼마나 좋은가. 회사는 고급지고 안정적이다. 더군다나 지방에서의 생활은 회사로부터 또 다른 보조 혜택을 덤으로 누린다.


이에 따라, 삶의 질을 높여 살아야겠다며 두 가지 실천 항목을 감행한다.


첫째로, 더 넓고 좋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25평에서 32평으로, 구형 아파트에서 신형 아파트로의 이동이었다. 뒷 산이 바로 아파트 옆에 있는 공기 좋은 곳이다.


둘째로, 전기만 많이 먹던 작고 오래된 냉장고를 버리고, 큰 마음먹고 고급진 대형 냉장고를 덜렁 샀다. 제법 뭔가 될 것 같은 안정감이 며칠은 뿌듯했다.


이렇게 구입한 당대 최고의 냉장고가, 얼마 후 캐나다로 실려가는 배편의 엄청난 부피 차지뿐만 아니라 이동 비용까지 지급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리라고 정말이지 까마득히 몰랐다. 적어도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아들이 선생님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엽서 한 장을 가져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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