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리차 Dec 20. 2021

앞차가 나한테 커피를 쏜다고?

외롭다는 빼박 증거들

외롭다는 걸 어떻게 알지?

영국에는 외로움 장관이 따로 있다고 한다.

외로움으로 인한 고통이 매일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가 나왔다.

외로움을 질병으로 인식하고 보살피고 해결해준다니 신박하다.

그런데 왜 하필 영국일까?

매일 비 오는 우중충한 포틀랜드 겨울 날씨를 직접 겪어보니 조금 알 것 같다.

햇빛을 보지 못하니 움츠려 들고 움직임이 줄어드니 게을러지고 우울해졌다.

비 오는 걸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조차 겨울은 힘들다.

최근엔 일본도 도입했다는데 이쯤 되면 그 외로움 장관이라는 거

날씨가 구린 모든 곳에 필요한 것 같다.

그런데 외로움이라는 걸 어떻게 측정하고 퇴치하는 걸까?


외로움? 그딴 건 가소롭지

이렇게 혼자 있길 좋아하는 내가 외롭다고?

그런데 그걸 구체적으로 느낀 건 며칠 전이었다.

그래 난 혼자 있길 좋아하는 주제에... 외로움을.. 타고야 말았다.


먹부림으로 채워보려는 외로움

방금 한인마트에 다녀와 국뽕을 충전하고 비빔밥을 먹었다.

그런데  인스타에서 '묵은지 들기름 파스타' 사진을 보고

걸신들린 사람처럼 그걸 만들어 먹는 나 자신을 보고 생각했다.

나 진짜 외로운 건가?

보통의 나라면 배불러서 다음에 만들어 먹어야지 했을 텐데

영혼의 허기 앞에서 무너졌다.

묵은지와 들기름이 만났을 때만이 내는 그 알싸한 감칠맛,

그 세계에 서둘러 빠져들고 싶었다.

맛있게 먹었고, 그 피드에서 극찬한 그 맛이 뭔 줄 알겠으나

내 마음속 한가운데는 공허함이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외로움따위 탄수화물로 해결될 줄 알았다.


책상에는 내가 주문한 신간들이 쌓여있고

넷플릭스로 보고 싶은 영화 드라마가 밀려있다.

그런데 내가 외롭다고?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러는 것 같다.

책은 온전한 독서 대신 하이라이트만 축약해주는 유튜브를 보고

영화도 2시간을 들여 한편을 보기보다는

클라이맥스만 잘 편집한 유튜브만 찾게 된다.

게다가 겨울 스키장에서 리프트가 멈춰 늑대에 물려 죽는 대학생 이야기랄지

아주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내용들에만 손이 갔다.

어느새 너무 많은 것을 겉핥기만 하고 빈 쭉정이만 남은 느낌.

이토록 외롭다는 구체적인 감정을 강렬하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앞차가 사주는 커피의 맛

외로움은 네버엔딩 단짠단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멧돼지가 되어 있었다.

결국 내 외로움의 수치는 몸무게로 측정되었다.

그래서 생각한게 "드라이브 뜨루를 끊자!"

미국생활이란 드라이브 뜨루로 시작해 드라이브 뜨루로 끝난다.

은행, 약국 심지어 동물원 불빛축제까지도 드라이브뜨루로 하는

드라이브뜨루 천국에서 그걸 끊기란 쉽지 않았다.

가능한 멀리 주차했다.

내 엉덩이가 솜사탕이다 생각하고 한걸음이라도 더 걸으려 종종거렸다.

그러던 아침, 스타벅스에 갔는데 회색 하늘에 보슬비가 내린다.

그날만큼은 죽도록 정말 차에서 내리기 싫었다.

요상하게 오늘만큼은 드라이브 뜨루로 주문하고 싶었다.

그런데 계산을 하려는 찰나 앞차가 내 커피 값을 냈다고 했다.

어머나 이게 말로만 듣던 그 Pay it forward 인가?

뒷사람 커피 사주기 릴레이는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즈버그에서 시작했고

11시간 동안 계속된 신기록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이게 뭐라고 모르는 사람이 사주는 커피 하나에 신이 났다.


그런데 내 뒤에 신기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냥 갈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랑 스몰 톡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난 오늘 이게 처음이라 이대로 빚지고는 못 간다!"

그런 찰나에 마침 차가 들어왔다.

나도 뒤차 커피값을 계산했다.

아 나도 드디어 해냈다!

이건 드라이브 뚜르라서 할 수 있는 놀이다.

만약 그냥 계산대라 뒷사람 걸 계산하면

따라와서 고맙다고 할 수도 있고

내가 가서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거 같다.

그 뻘쭘함 어쩔 거임?

그런데 드라이브 뜨루는 계산하고 도망칠 수 있어서 좋다.

도망치는 건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뒤차 커피 계산하고 줄행랑치는 거 정말 상쾌하다.

줄행랑치는 내가 왠지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착각이 들었다.

이 감각을 기억해 두고 싶다.

그 순간 최근에 외롭다고 생각했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외롭지 않았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도 본 적 없지만 서로 온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서로를 돌본다는 느낌이 좋았다.

뒤차가 들어오는 순간 그게 뭐라고 우리는 너무 반가웠고

아르바이트생과 눈을 마주치며 그 기쁨을 공유했다.

그럴 때 뇌에서 뿜는다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을 분명히 느꼈다.

이역만리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기보다는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동네 사람과 추억 만들기에 집중하고 싶어졌다.


친구를 돈 주고 빌린다고?

‘렌트어프랜드’라는 앱이 최근

맨해튼에 갓 이사 온 전문직 종사자에게 인기가 많다는 기사를 봤다.

돈을 주고 친구를 빌리는 시대라니! 정말 궁금하다.

같이 쇼핑을 하고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니!

커피를 주문하듯 우정을 주문하는 일이라니!

바닐라 라테 파이브 펌스 톨 사이즈처럼

에세이를 즐겨 읽고 빈티지 그릇 쇼핑을 좋아하며 개성 있는 카페를 잘 아는 여성이요

이런 건가?

미용실에서 말 거는 게 부담스러운 나 같은 사람을 위한 서비스도 있나?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이 온 것 같다.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장 쓰고 버리는 일회용 감정이 아니라

긴 시간을 두고 서로의 흑역사까지 목격한 묵은 감정같다.


진짜 우정이란 깨끗하고 반듯하고 예쁜 관계가 아니라

‘내가 그 말을 괜히 했나?’로 이불 킥하고

‘와 진짜 드럽게 부럽네 ‘ 질투를 불러일으키고

내가 병신 짓을 할 때 긁어주고 눈물을 쏙 빼기도 하는

꺼내기에는 너무 구차한 서운함이 차오르는 약간은 구질구질한 그런 관계 같다.

소소한 에피소드나 TMI는 자동으로 업데이트돼서

구구절절 설명 필요 없고

긴 터널을 지나는 구간, 자폭하는 구간에서도

내 상태를 알아차리는 친구 말이다.

그런 건 돈 주고 못 사잖아?

전문가들은 돈주고 친구를 빌리는 이 시장이 앞으로 더 커질거라 예측한다.

그렇다면 나중엔 친구 렌트 어플에 이런 프리미엄 서비스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상대의 흑역사나 쭈구리 시절까지 섭렵하면 더 비싼 패키지 말이다.


서로의 흑역사를 아는 친구의 소중함

스타벅스에서 앞차가 사주는 커피를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다.

그건 구질구질 흑역사를 서로가 아는 친구만이 할 수 있는 일 같다.

“너 그때 머리 싸매고 누워서 내가 죽사서 간 거 기억 안 나?”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내가 전남친을 못잊어서 요상한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아니 전혀 기억나지 않는 금시초문의 일이다.

한없이 하찮은 작은 티끌까지 기억해주는 사람이다.

정작 나는 다 까먹은 나의 찌질한 쭈글이 시절을 증언해 줄 때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친구의 머리에 내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존재가 너무 소중해졌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외로움 장관보다 그 친구의 존재다.

진짜 내겐 그런 친구가 딱 두어 명인데, 

지금이라도 정신차리고 제가...귀하게 뫼시고 보필하겠습니다.

이전 04화 미국 마트에서 망원시장의 냄새가 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