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구멍가게가 보내준 여행

작지만 끝내주는 마트일기

by 보리차

“뭐? 외교관 스위트?”

파리여행 중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묵기로 한 파크 하얏트 방돔 호텔방이

방금 외교관 스위트로 업그레이드 됐다는 소식이었다.

내 생애 가장 럭셔리한 호텔방이었다.

이 마법의 주인공은 바로 카드 포인트 박사, 우리 집 슈퍼맨이다.


슈퍼맨은 나와 결혼 후, 마치 새로운 종교를 발견한 사람처럼

카드 포인트 혜택이라는 것에 빠져들었다.

밤마다 리워드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캐시백 비율을 암송하고

마일리지 적립 시스템을 해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분야의 큰손이 됐다.

스몰 비지니스를 하고 있었기에

우리가 공식적으로 카드를 긁는 일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구멍가게를 운영하지만,

카드 포인트로 전 세계를 누비게 됐다.


미국이란 자본주의 천국은 카드혜택이 어마어마하다.

처음엔 너무 말이 안 돼서 슈퍼맨이 거짓말 치는 줄 알았다.

뉴스에 나온 사람 이야기도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신용카드 30장 돌려쓰며 세계일주 33개국 공짜로 다닌 남성>

그는 사회복지사 월급으로도 한 개인이 포인트 전략을 잘 짜면

이런 여행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줬다.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비트코인을 살 때,

우리는 여행 포인트로 바꿔 우리 자신에게 투자했다.

새로운 공간은 새롭게 인간을 빚어낸다.

우리의 그렇게 ‘여행이 장땡’이라는 신념아래

거침없이 온 세계를 휘젓고 다녔다.


5성급 호텔과 비지니스 좌석.

진짜 부자들의 여행이라기 보단,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재밌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체험하는 기분이다.

내 인스타 피드만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자 같지만

현실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슈퍼맨의 아내다.


여기까지 오는 길엔 구불구불 돌고 도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일찌감치 내가 여행중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여행을 가지 않으면 풀이 죽어 버린다.

한때는 ‘밥 먹듯이 여행하는 인생’을 꿈꿨다.

그래서 <제드티켓>만 노렸다.

(*제드티켓: 항공사 직원 가족에게 제공하는 무료티켓)

그래서 사람을 보지 않고

직업만 보며 소개팅하고 다녔다.

온갖 머리를 굴려봤지만 쫄딱 망했다.

그런데 오히려 개이득!


그때 만약 내 검은 속내가 먹혀들었다면 끔찍하다.

직업만 보고 결혼했으면, 지금만큼의 여유 있는 여행은 못 했을 거다.

<제드티켓>이라 해봤자 이코노미 대기표였을 테고,

외교관 스위트 같은 건, 이름도 몰랐겠지.

델타 비지니스에서 돼지국밥도 못 먹었겠지.


이런 인생이 내게 올지 전혀 몰랐다.

코로나의 한가운데, 나는 큰 바다를 건넜다.

내가 원하는 ‘밥 먹듯 여행하는 삶’을 가능케 하려면

“나는 내 직업을 가지지 않으면 끝장이다.” 며 각오를 다졌다.

“절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 주문으로 외우며

항상 차에서 슈퍼맨을 기다렸다.

단 한 번, 손끝이라도 스치면

나는 내 버젓한 직업을 가져보지도 못하고

슈퍼맨의 똘마니로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우리를 덮쳤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마트 알바생이 되었다.

온몸으로 거부했으나, 내 힘으로 막을 수 없었다.

진짜로 내가 원하는 ‘밥 먹듯이 여행 가는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오지 않았지만

조금, 늦게,

대신,

생각지도 못한 게 찾아왔다.




신이 당신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게 한다면
당신이 요청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받을 준비를 하라

- 모건 프리먼-



나는 이 말을 내 발바닥에 새겼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톡톡, 발끝에서 전해지는 느낌과 함께

더 큰 확신을 품고

그 의미를 생생히 느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