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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백 패션쇼

일상의 천재들

by 보리차

고민이 된다고? 나는 여전히 샤넬백을 추천한다.

결국 에코백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건 어떤 한 시절에 열병처럼 앓게 되는 폭풍 같은 사랑 같은 거다.

거부하지 말고 그 상황을 즐겼으면 한다.

샤넬백을 들다가 에코백을 드는 것과

그걸 건너뛰고 에코백을 드는 것은 너무 다르다.

샤느님으로 겉멋 부리는 시절도 인생에선 꼭 필요하다.

굳이 순서를 정하자면 샤넬이라는 강을 건너 에코백으로 오는 걸 추천한다.

샤넬을 고민했던 과거의 나에게

에코백을 드는 지금의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다.


샤넬을 드는 기분을 알아야 에코백을 드는 맛도 알게 된다.

샤넬을 들면 나 자신이 얼마나 웃긴지 알게 된다.

샤넬 가방을 모시고 다니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우스꽝스럽다.

포인트는 그 당시에는 전혀 모른다는 거다.

그걸 들 때 나는 내가 아니었다. 샤넬의 보디가드였다.


샤넬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내 삶은 압도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에코백 메는 내가 좋았기에

샤넬 드는 나를 누가 좋아해 주기 바랄 필요가 없었다.

그때 맛본 해방감이란, 내 인생에 꼽히는 즐거움이다.


에코백을 메고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레 구두를 벗고 운동화만 줄곧 신었다.

내가 샤넬백을 호위했듯이 이제는 에코백이 나를 호위한다.

나는 단박에 천하무적이 된다.

공원을 산책하고, 책방에 들러 책을 사고, 마트에 들러 야채와 과일을 산다.

이 모든 일상을 통합하고 서포트해 주는 건 에코백이다.


파머스 마켓에 가면 에코백 지름신이 찾아온다.

귀여운 에코백은 못 참지!

잘 들여다보면 에코백 패션쇼 현장이다.

내 눈에 콕 박히는 에코백이 보이면 졸졸 따라가 사진을 찍곤 한다.

샤넬이야 샤넬 매장으로 가면 되지만

에코백이야 말로 그 출처를 알기 쉽지 않다.

그 은밀함이 매력적이다.

유칼립투스가 삐죽 고개를 내민 에코백,

이 뒷모습은 정말 독보적으로 스타일리시하다.

에코백을 레이어드 하는 것도 멋지다.

에코백은 조금 망가져야 멋이 난다.

손잡이만 하얗게 바래진 거, 귀퉁이만 구멍 난 거

오히려 망가질수록 갬성이 쌓인다.

교회에 가면 똑같은 명품백이 많아 헷갈린다는 데

에코백을 가져가면 그럴 일도 없다.


에코백에는 단 하나의 목표가 있다.

바로, 우리의 일상을 자유롭게 하는 것!

'무엇이든 처리해드립니다'와 같은 가능성 덩어리다.

'오늘 하루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뭘 싹쓸이 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대비해야 해!'

갑자기 닥치는 우여곡절에도 운동화를 신고 뛸 준비가 되어 있는 기분이다.


파머스마켓에서 다들 식재료 사느라 바쁜데

나는 에코백 패션을 엿보느라 바쁘다.

재밌는 에코백만 졸졸 따라다니다 보면

막상 그 주인과 대화해 보지 않아도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일상의 천재들은 모두 에코백을 멘다.

자신의 일상을 자신의 손으로 돌보는 사람들이다.

그런 세계관이 담긴 게 가방이 에코백이다.

그 안에는 로컬에서 수확한 싱싱한 과일과 야채가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먹을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각자가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은 다 다르겠지만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들이다.


도쿄에서 잠시 살 때였다.

베프와 시스타는 같은 시기에 날 방문했다.

둘은 무인양품에 뛰어 들어가더니

아무런 무늬가 없는 그야말로 무지의 에코백 두 개씩을 샀다.

아직 서울에 무인양품이 들어오기 전이었다.

“아니, 저걸 돈 주고 산다고?”

내 눈에는 그냥 공짜로 줘도 갖기 싫은 그저 그런 것을 두 개나 사다니 신기했다.

귀한 걸 손에 넣어 뿌듯한 그 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에코백을 두 개나 쟁여놔서 정말 안심이라는 안도감.


벌써 15년 전 일인데 아직 그 에코백을 쓰고 있는 베프를

나는 일상의 찐 천재라 부른다.

겨우 이제야 에코백을 즐기는 그들의 갬성을 따라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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