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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득 찬 낙원에서 사는 상상

북러버라면 한 번쯤 꿈꾸었을

by 코코

비슷한 수준의 일들이 매일매일 반복되었던 대학원생 시절 말도 안 되는 농담들이 톡톡 비타민같이 터지며 활력을 줄 때가 많았다. 그중 하나가 매주 동기 오빠의 '나는 다음 주부터 사라질 거다. 로또 1등 당첨될 거니까'라는 선전포고. 그 말을 들은 나와 다른 동기들은 아주 진지하게 너도 나도 '지분이 있다'며 내 몫을 달라는 억지를 부리곤 했다.


한 번쯤 거절할 법도 한데 매번 알겠다며 받아주는 오빠 덕에 각자 즐거운 상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고민 없이 예전부터 꿈꿨던 것을 말했다.


"오빠 나는 OO문고, 그거 내 명의로 만들어주세요."


내가 살 던 지역에 큰 서점이 들어서서 방문했던 날, 끊임없이 펼쳐진 거대한 책장들과 책들의 모습에 녹아들고 말았고 처음으로 어마어마한 돈 욕심이 생겼다. 내 명의로 바꿔서 문을 싹 닫고 하루 종일 나 혼자서 돌아다니며 책을 읽고 싶었다. 오롯이 나 혼자서.


어쩌면 나는 늘 책 속에 파묻히는 낭만을 꿈꿔왔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책 속에서 서재에 대한 묘사를 읽을 때면 묘한 설렘이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방 3면을 차지하고 있고 방 한가운데에는 책상과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으며 뒷 벽면은 커다란 유리창이 있고 그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 서재, 물론 의자에 앉아있는 건 책 속 등장인물이 아닌 나였다.


중학교 때 내가 만드는 집 도안에서도 이 서재가 존재했으며 본가를 떠나 자취를 하던 작디작은 원룸에서도 책을 둘 공간을 만들어 소소한 시간을 즐겼다. 출산 후, 이제는 아이의 물건들로 넘쳐나는 상황이지만 상상 속 서재만큼은 아니더라도 책을 두는 공간을 마련해 매일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북러버로서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출판의 도시 파주에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꼭 가고픈 곳이다. 지혜의 숲에서는 나는 또 얼마나 놀라움과 경이로움으로 압도될까라는 즐거운 기대도 해 본다.


북러버는 공감할 것이다. 책을 읽는 즐거움도 있지만 그저 책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책에서 풍겨오는 그 향기가 얼마나 감미로운지를. 알록달록한 책의 표지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공감받을 때 얼마나 반가운지를.


퇴사 전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남편이 읽지도 않은 책을 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선배의 남편분께서 북러버라는 사실을 알았고 남편분을 대변하여 왜 버리면 안 되는지를 알려드렸다. 나중에 선배가 하는 말이 사실 이미 남편분께서 나와 같이 이야기하셨단다. 선배는 그저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평소 말수가 별로 없는 내가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보고 진심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아무도 알아주진 않았지만 그때 북러버로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내 손에 책 한 권이 쥐어져 있다는 것, 나에게는 행복이다. 지루할 틈도 없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상상을 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책으로 가득한 곳에서 원 없이 읽고 사색에 잠길 수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나에게 최고의 낙원이다. 그곳에서 사는 나를 오늘도 조용히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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