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적 취미 수집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이 어떤 옷차림을 좋아할까, 무슨 음식을 좋아할까, 같이 뭘 해야 즐거울까, 얼마간은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입력하기 바쁘다. 그 정성을 스스로에게 쏟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자기에 대한 정보도 끊임없는 갱신이 필요하다. 변화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해 주고픈 그 마음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보단 익숙한 것에 더 손이 가는 나이지만, 나에게 집중하다 보면 스스로가 생경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대로라면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어서도 매일매일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럿이서 있는 게 좋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이 충전의 한 방법인 것도, 늘 입던 스타일만 입다가도 새롭게 도전해 본 스타일이 꽤나 잘 어울리는 것도, 늘상 정적인 운동만 하다가 동적인 운동에 가슴 뛰는 것도, 겨우 한 번의 도전이 만들어낸 결과다. 역시나가 역시나인 경우도 있지만, 통계를 내리기엔 아직 미미한 지수다.
어릴 때 나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꼭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었다. 보통은 배움의 욕구가 강했는데, 학원을 강제하지 않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음악이 배우고 싶으면 음악을, 언어가 배우고 싶으면 언어를 배웠다.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오로지 혼자서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건 타고난 성격도 있겠지만, 언제나 나를 믿고 지지해 준 부모님의 영향도 크다.
하지만 끈기는 내게 따라붙는 옵션 같은 거였다. 무언가를 지속할 힘을 갖기엔 나는 자주 싫증을 내는 아이였고, 또 다른 흥미에 쉽게 마음을 빼앗겼다. 자연히 내 관심사는 다른 데로 옮겨 붙었고 이전 자리에는 다 타버린 재만 남곤 했다. 취향이나 취미랄 건 생기다 만 모양으로 그을려졌을 뿐 오래 머물다 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쯤 흘렀을까. 종잡을 수 없던 내 욕망의 종착지는 사진이 되었다. 고된 입시생활을 마치고 몇몇 대학에 붙었을 때 그 유난스러운 '싫증'이 다시금 피어났다.
아주 얌전한 모양새로 신선한 자극을 좇던 유년 시절의 '나'와 달리, 어른이 된 '나'는 별달리 좇는 게 없었다. 여전히 그림을 잘 그리거나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에 대한 선망은 있으나, 취미를 만든답시고 뒤늦은 도전을 하기엔 어쩐지 겁이 났다. 염려했던 것보다 더 엉망인 실력을 확인하게 됐을 때, 어쩌면 내게 숨겨둔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무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무턱대고 저지르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내 능력치와 한계를 애써 시험할 필요가 있겠냐며 뒷걸음질 치기 바빴고, 그러려면 가능한 행동반경을 좁히는 게 최선이었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내가 뭘 선호하고 뭘 선호하지 않는지 겨우 취향을 알아가는 일일 뿐인데 나는 낯선 세계에 뛰어드는 일이 매 순간 겁이 났다. 저울 위에 놓인 생선 꼴이 되지 않겠냐며 말이다.
그럼에도 타고난 욕망은 좀처럼 나를 가만 두지 않는다. 운동에는 젬병인 내가 새로운 스포츠에 도전하는 것도, 생필품을 살 때는 단 돈 만 원도 아까워하면서 클래스를 결제할 때는 몇 십만 원도 긁는 걸 보면 여전한가 싶다. 무턱대고 저지르는 힘은 사라진 지 오래라 하기 전 수 백번의 고민이 뒤따르지만, 내 들끓는 욕망은 단 1회 출석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채워진다.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거나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거기까지 가는 내 용기에 있다. 그러니까 대범해지려 한 나의 도전은 쉴 새 없이 나를 다그치는 내게 항변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내 취향을 알아가는 과정은 늘 따끔함을 동반한다.
아마도 나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문 앞에 서는 순간과 저울 위에 놓이는 순간을 도돌이처럼 반복하며 살아가겠지만, 조금 엉성하더라도 선한 욕망이 그득한 할머니의 모습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좋아하는 책도, 음식도, 영화도, 음악도, 운동도, 취미도, 단숨에 써 내려갈 수 있는 그때까지 얼마든지 꿈꾸고 도전하기를,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안아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