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릴 용기를 산다.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옷 세 뭉텅이를 버렸다. 몇 해 묵은 마음도 함께 버려졌으려나. 물건의 값어치를 떠나 한 번 품은 물건을 버리는 건 매 번 매 순간 어렵다. 몇 푼 안 되는 물건일지라도 당시 지불한 비용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깝다, 아깝다는 생각이 스칠 때면 언젠가 쓰일지 모른다는 미련이 샘솟는다.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같은 생각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나는 물건을 꽤 많이 사들이는 편에 속했다. 물론 지금도 타고난 물욕을 버리진 못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사지 않고 지나치는 날이 대부분이다. 허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출을 감행하지만,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사들인 물건들을 보면 과거의 내가 원망스럽기도 하다. 한 번밖에 입지 않았거나 택도 안 뜯은 옷을 볼 때면 더더욱.
나는 인터넷 쇼핑을 선호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단 돈 몇 푼이라도 저렴하게 사는 게 좋았고 그렇지 않으면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고 입어보지 않고 체험해보지 않고 소비하는 모든 것에 위험지수가 따른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무시하려 애쓴 걸지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사이즈 미스이거나 생각보다 효능이 별로거나 근거 없는 소문만 무성했던, 이 모든 것들에 나는 '경험'이라는 말을 갖다 붙였다. 이런 것도 경험이지, 이렇게 알아가는 거지, 모든 합리화는 내 소비를 정당화시켰고 내 돈은 결코 헛되이 쓰이지 않았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말 그랬을까? 내 돈은 헛되이 쓰이지 않았을까?
내가 무슨 색이 어울리는지, 촉감이 부드러운지, 기장감은 어떤 게 좋은지, 실제로 얼굴에 대 봐야 알 수 있는 옷들이 많다. 입어보는 과정까지 거치고 나면 목 뒤 상표가 따갑다든지 카라가 너무 솟아 목이 짧아 보인다든지 주머니에 손 닿는 위치가 영 어색하다든지 하는 사소한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맨 살에 착 감기는 옷을 만났을 때 비로소 지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인터넷과 비교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 아니라면, 손님을 상대하는 직원의 수고로움과 그 자리에서 기꺼이 지불할 만큼 마음에 드는 물건의 가치, 집까지 쇼핑백을 들고 가는 순간의 행복까지 값을 들여 사는 것이다. 그만큼 그 물건을 아끼게 될 앞으로의 순간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처음 품을 때의 마음을 귀히 여기고 나니, 아무래도 버릴 용기가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쉽게 버릴 거면서 뭣하러 사들였을까. 돈 주고 상실감을 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자산을 꼭 취득과 상실의 개념으로만 본다면 실상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한 인간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하루쯤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도 그리 용납 못 할 일은 아닐 텐데 우리는 꼭 영원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가 따른다. 세상에 영원한 게 과연 있기나 할까. 그럴 때면 난 버릴 용기를 산다. 품는 마음에는 자연히 버릴 용기라는 옵션이 따라붙어, 우리가 이별을 고할 때 우리 앞에 선다. 언젠가 내 몸에 맞지 않을 수도, 그때의 나에게 어울리지 않을 수도, 유행이 한참 지나 손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순간이 오면 과감히 버리면 된다. 품으려는 순간, 품었던 동안, 품은 후의 내가 따뜻했다면 그만하면 됐다. 마찬가지로 나와 맞지 않는 누군가 때문에 몸과 마음에 자꾸만 생체기가 난다면 버릴 용기를 사면 된다. 몇 해 묵은 마음까지 들리어.
이마저도 지칠 때면 처음에 조금 뜸을 들이면 된다. 집에 무언가를 사들이거나 누군가를 내 마음에 들일 땐 좀 더 멀찍이 내다보는 것이다. 언젠가 작별하는 순간이 조금은 아플지라도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이 너무 좋았다고, 당신을 품은 내내 아주 행복했다고, 그러니 잘 가시라고 말해줄 수 있겠냐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그 정도 확신쯤은 가져야 귀한 내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귀하게 품자, 마땅히 버려야 할 순간에 과감히 버리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