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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도댕 Oct 14. 2023

아무 짝에나 쓸모 있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인간의 뇌는 휴식기,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바삐 움직인다고 한다. 이때 활성화되는 뇌의 영역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 하는데, '무위'의 시간이 자아성찰을 하거나 창의력을 높이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멍을 때리거나 한강 둔치에 앉아 사색에 잠기는 순간에도 뇌는 뭐든 해 보려고 애쓴다고 하니 어쩐지 기특하면서도 가여운 마음이 든다. 몸뚱아리는 이토록 편히 쉬는데, 너는 참 바쁘게도 움직이는구나.


쉬는 날 이렇다 할 약속이 없거나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을 때면 왜인지 모를 죄책감에 시달리고는 한다. 귀하디 귀한 시간을 하릴없이 태워버린 기분이랄까. 축 가라앉은 기분은 밀린 집안 청소를 하거나 하다 못해 옷장이라도 헤집어야 다시 떠오른다. 늦게나마 영화 한 편을 보거나 책이라도 한 권 읽고 나면 죄책감이 조금은 씻긴달까. 밤이 늦었다는 핑계로 지그시 눈을 감으면 나의 게으름은 오늘도 외면당한다. 별 소득 없는 하루, 이대로도 정말 괜찮은 걸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의지만, 정말로 오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생각이 들 때면 그 밤의 나는 한 없이 작아진다. 그런 밤엔 잠이라도 충분히 자 다음 날의 컨디션을 대비하면 좋으련만, 꼭 그렇게 새벽 시간마저 까맣게 태우고 나서야 비로소 잠이 든다. 다음날은 좀 다르길 바라면서.


일과 사랑, 인간관계 그 무엇도 놓치지 않는 누군가는 평일이고 주말이고 바삐 보낸다. 반면 누군가의 주말은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 쉬는 날에는 평일에 다 써버린 에너지를 충전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에는 지난날을 회상하거나 후회하고, 다음번에 있을 일을 계획하거나 다짐하는 등 나름의 지진이 일어난다. 지진을 대비하려면 어디든 기어 들어가 한껏 웅크리는 게 당연지사거늘 하루 종일 웅크려만 있을 거냐고 잔소리만 늘어놓았으니 좀 전의 나에게 응당 사과하는 게 마땅하다. 물론 잡념이 계속되면 우울을 낳기도 하니, 퐁당 빠지기 전에 움직이거나 잠드는 게 좋겠지만.


언제까지 하릴없이 누워만 있을 거냐고 꾸짖을 때도 있지만, 어차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매일의 나는 없다. 바삐 살다가도 낭비되는 하루가 있고, 그 하루마저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쓰임이 있다. 그러니 쉬이 버려지는 하루는 단 한 개도 없는 것이다. 게으르다고 알려진 나무늘보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적의 동태를 살피는 데 쓴다고 한다. 세상 편해 보이는 나무늘보마저도 고군분투하는 마당에 우리라고 가만히 누워 과거의 시간을 곱씹고 미래를 걱정하는 일이 쉬울 리가. 그러고 보면 날 못살게 구는 범인은 언제나 나였다.


누군가의 삶을 재단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건 스스로에게조차도 마찬가지다. 죄를 저질렀거나 도에 어긋난 행동이 아니라면 그 누가 내 삶을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 정신과 육신을 소유했다고 믿는 자기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때로는 힘차게 살아갈 때도 힘겹게 살아질 때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만듦새가 다른 것도, 인생의 모양새가 다른 것도, 하루의 쓰임새가 다른 것도 존중할 때다. 누가 더 값진 인생을 보냈는지 우위를 가리자는 것도,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열심히 사는 이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누구도 아닌 오직 나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나의 세상에선 나의 속도로 나아가도 된다는 뜻이다. 각자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어도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빛날 테니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꼭 한 번은 그런 순간이 올 테니까.


나는 오늘도 아무 짝에나 쓸모 있는 하루를 보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삶을 계속해서 영위해 나가 줘서 고맙다고, 오늘은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길 바라면서 잠이 든다. 어찌어찌 잘 버티어 그 끝에 다다르면 웃으며 악수하자고, 시절시절의 우리가 한데 모여 있을 그곳에 가면 꼭 그러자고 말이다. 정말로 그 끝에는 삶을 완주한 우리가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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