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념치 않는 연습
어느 분야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돼라, 는 말은 세상의 수많은 2위들을 울린다. 거기에 '고작, 겨우, 그 정도밖에'라는 말까지 붙으면 그 고작에조차 속하지 못한 3위의 슬픔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렇다면 꼴찌는 사회로부터 도태된 잉여인간에 불과한 걸까. 간절한 바람을 담아 목표를 세웠다면 누구나 선두에 오르고 싶어 한다. 꼭 선두그룹에 들지 못하더라도 평균을 웃도는 성적을 내길 바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암만 노력해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형편없는 실력이 만천하에 들통날 때면 우리는 쉽게 주눅이 들곤 한다. 나는 아무렇게나 돼도 상관없어, 꼴찌여도 괜찮아 뭐 어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들마저도 간절한 대상 앞에선 그 누구보다 열과 성을 다할 것이다. 그래, 잘하면 좋지.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일 거야.
그러나 꼭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스스로를 더 궁지로 몰아넣는다. 자기 자신을 옥죄면 옥죌수록 몸과 마음 어딘가는 꼭 다치기 마련이다. 운 좋게 멀쩡하다고 한들 현재에 만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강박을 가지지 말라는 말이 열심히 살지 말라는 말은 아니며, 꼭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 적당히 평균만 하며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대체로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고민에 고민을 더해 스스로를 좀 먹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성과만 낼 수 있다면 스스로를 갉아먹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성과주의자 입장에선 의문이 들겠지만 그들 역시 완전한 성공을 이뤘냐는 물음에는 아직 그러지 못했다고 답하지 않을까.
각 분야의 적임자를 가리거나 최고 권위자를 선정하는 데 있어 평가는 당연한 일이나, 요즘 보면 타인을 평가하는 게 참으로 쉬운 세상이 된 듯하다. 쟤 좀 봐, 쟤는 저게 문제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늘어놓는 사람들을 보면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냐고 묻고 싶다. 사회에서의 평가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어 결과에 기뻐할 이가 있다면 그 깊이만큼 슬퍼할 이도 있다. 동일 선상에 서 있음에도 명암이 극명히 나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위 레벨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의 지난 시간과 노력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저마다의 노력이 부족했을 순 있어도 그것은 실패의 절대적인 이유가 아니며, 운도 실력이라고는 하나 실패는 조롱당할 거리가 아니다. 이왕이면 잘했어야지, 그 정도 핸디캡쯤은 극복했어야지, 더 더 노력했어야지, 몇몇 타인은 꼭 뼈 아픈 말들을 한 데 뭉쳐 뒤통수를 후려친다. 당사자의 마음은 헤아려본 적도 없으면서.
나이가 들수록 추구하는 가치관이 달라진다. 사회적 성공을 바랄 때도, 다복한 인간관계를 바랄 때도, 경제적 부를 바랄 때도, 건강한 정신과 육신을 바랄 때도 있다. 적어도 해마다 한 번씩은 다짐하게 되는 소망은 어디든 어떤 형태로든 가 닿는다. 목표를 세울 때의 거창한 마음과는 달리, 삶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을지언정 절대적 실패는 없다. 또 다른 시작점을 얻은 것뿐이니까. 정신승리를 한다고 비꼬는 사람들 앞에 무슨 말을 하겠냐마는, 다음으로 나아가려면 어찌 됐든 착지할 곳은 필요하다. 낙하지점이 잘못 됐어도 새롭게 도약할 힘이 남아야 어찌어찌 새로운 곳에 가 닿지 않겠는가.
우리는 분명 어딘가에 가 닿기 위해 살아간다. 그 끝이 유토피아면 참 좋으련만, 모두가 같은 지점에 착지하는 게 가능하다면 애초에 무언갈 바라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그만큼 간절하지도 그다지 빛나지도 않을 테니까. 지난한 그 길에는 돌부리도 있을 것이고 무방비 상태에서 달려드는 들짐승도 있을 것이다. 세찬 바람에 떠밀려 가거나 바닥에 내리 꽂힐 때도 있을 테고. 사실 이러한 외부요인이 없더라도 제 풀에 지쳐 로프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버티는 힘, 되는 데까지 해보는 자세, 그거면 된다. 그 끝이 어디든 가 닿기 위해, 오늘도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