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도댕 Jan 24. 2023

우리가 겪은 몇 번의 연초

뜻대로 되진 않아도

활발한 성격과 활동적인 성향이 분리가 되는 단어라면 나는 활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ESFJ와 ISFJ를 넘나드는 나는 연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바쁘게 지내려고 하지 않는다. 당연히 새해라고 특별할 건 없다. 연말 시상식에서 하는 카운트다운을 보면서 속으로 소원을 빌던, 새해 일출을 보겠다고 하다못해 집 앞 공원이라도 나가던 나는 이제 없다.


새해 첫날을 요란하게 보낸다고 해서 그 해가 특별해지진 않는다는 걸 깨달아서일까.



특별할 건 없어도 즐거운 일은 하나 있다. 파워 J들의 연중 최대행사, 연초. 나는 계획을 짜는 것을 즐긴다. 즐긴다는 표현보단 사랑한다는 표현이 맞다. 계획을 짜는 '행위' 자체에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 그런데 나 정말 행복한 거 맞나?


가슴 벅찬 나의 행위에 찬물을 끼얹는 건 언제나 나의 끈기다. 작년 연초에 세운 목표가 연말에 전혀 성과를 이루지 못했음을 깨달을 때면 나는 한 없이 작아지곤 한다. 아, 입만 살아가지고.



삼십 대가 되면 나는 꽤 멋진 사진작가가 되어 있을 줄 알았다. 지원한 사진과에 다 붙고 나니 마치 꿈을 다 이룬 것만 같았다. 딱 그때까지만 즐거웠던 것 같다. 졸업하고는 에이전시, 스튜디오, 마케팅 회사를 전전했다. 스스로의 가치를 낮게 보던 나는 상향 지원은 꿈도 꾸지 않았고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할 줄도 몰랐다. 작은 회사에 들어가 일을 뭉텅이로 쳐내면서 1인 다역을 하는 게 내 천직이겠거니 생각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주력하다 보니 지금은 꼭 필요할 때만 카메라 앱을 켜는 걸로 만족한다. 그때 깨달았다.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나는 한 치 앞의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즐겼다. 비교적 예견하기 쉬운 정도의 미래를. 원래도 계획을 짜는 일이 즐거운 성격에 계획을 쪼개고 쪼개 더 많이 세우는 일이 얼마나 즐거웠겠나. 그렇게 일과 공부, 운동, 집안일, 약속, 저축 등 삶을 세세하게 쪼개 체크리스트를 채워 나갔다.


그러나 늘 겪는 몇 번의 연초에서 나는 내게 자주 실망을 했다. 내 실행력과 끈기가, 잘 살고 있던 나를 바닥으로 잡아끌었다. 뭐야, 나 대단한 인간이라도 될 줄 알았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안돼?



20대 내내 줄곧 써왔던 아이폰 기본 메모 앱에 나는 2천 개에 달하는 메모가 있다. 일하면서도 종종 썼으니 개인의 지분은 1천 개쯤 될 듯하다. 웃으며 덮어버린 메모장이 잉크로 떡질 때면 그걸 다시 한 장 한 장 펴내는 것이 두려워진다.


내 남은 30대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내도 되는 걸까. 아마도 사는 내내 나는 정답을 찾아 헤매겠지만 마흔의 나는 조금 달랐으면 한다. 과거의 나를 몰아세우지 않고 한 명 한 명 안아줄 수 있기를. 잘은 모르겠지만 거긴 좀 어때? 이번에는 안아 줄거지?


이전 08화 관찰자로 살아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