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연철 Jan 29. 2024

환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이야기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좋습니다 (5)

선은 반드시 이긴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다 보니 그렇지 않은, 아니 그 반대인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됩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득세하기도 하고 불의가 정의의 가면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의가 실현되는 이야기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됩니다. 옛날이야기의 권선징악, 그림책의 사필귀정, 드라마의 인과응보에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정의를 갈구하는 우리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는 나 자신조차도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자님이 아니라 제 이야기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반복되는 비도덕적인 일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나에게서 벗어나 정의로운 사람으로 변모하고 싶은 마음이야 정말 간절하지만, 진짜로는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됩니다. 이야기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갈망하는 우리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기대 충족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현실에만 안주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갈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바람을 담은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이야기가 실천이 되고 이야기가 현실이 되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아이의 기대를 담은 이야기, 그래서 허무맹랑한 이야기. 그 이야기가 현실로 구현될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이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1) 그럴 수 있습니다! 검은 백조(Black Swan)와2)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Image by Ilo from Pixabay


이야기는 환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아이들의 이야기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이야기를 했었죠! 환상은, 아이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 놀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하위징아는, 현실의 삶과 구분되는, 놀이만의 마법적 시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매직 서클(magic circle)’ (Huizinger, 2018)이라는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놀이란 오직 매직 서클 안에서만 유의미한 것이며 그 안에서의 규칙과 관습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위징아의 주장과는 달리, 아이들의 놀이는 환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항상 현실과 환상을 오고 갑니다.      


아이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말은, 이야기 속에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에서도, 현실과 상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말은, 이야기를 통해 실천을 이끌어내기가 쉽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른의 경우, 이야기 따로, 실천 따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실천으로 옮기려면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경우 특별히 용기를 내지 않아도 이야기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서나 놀이에서나 가상과 현실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 그 말에 동의하시나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허무맹랑함일 수 있습니다.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마음껏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 있다면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나요? 


이야기는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에 힘을 싣기 위해 연암 박지원 님의 말을 가져왔습니다. 박지원 님은 자신을 소소선생(笑笑先生)이라고 불러달라면서(박지원a, 2007: 194쪽), 이야기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 아우는 막 이불을 끼고 식전 마음으로 미음을 마시다가 이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큰 웃음이 터져 배를 틀어잡고 킥킥거리니 갓끈이 썩은 나무 꺾어지듯 끊어지고, 입에 머금은 밥알이 나는 벌떼같이 튀어나오며, 마치 독한 종기가 한참 심하게 곪았는데 긴 침으로 찔러 터뜨리니 고름이 튀어 의복은 비록 더러워졌지만 기분만은 갑자기 상쾌한 것과 같았소. (박지원a, 2007: 262쪽, ‘웅지에게 답함’의 내용 가운데 일부)                




박지원a(2007). 연암집 (상). (신호열, 김명호 역). 파주: 돌베개.

Huizinger, J.(2018).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 (이종인 역). 고양: 연암서가.          




1) 2009년 루리웹이라는 게임사이트에서 응모 이벤트를 마련했는데, 아이디만 다른 2명이 세 번이나 추첨에 당첨되면서 사용자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이에 대해 루리웹 운영진이 올린 해명 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2) 나심 니컬러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라는 경영학자가 제안한 개념입니다.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건이 실제로 발생하면 나중에 그 근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고는 필연’이었다는 과장이 일어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전 15화 터무니없는 말도 일단 믿어주면 어떨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