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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연철 Feb 16. 2024

삿된 생각이 없어야 동심

부적절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 어떻게 하죠?(10)

공자 님은 시경(詩經)에 담긴 시 300수에는 삿된 생각이 담겨 있지 않다고(사무사, 思無邪) 말한 바 있습니다(논어(論語)의 위정(爲政) 편). 사무사(思無邪)라는 말, “(바르므로)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라는 말은 원래 노(魯) 나라 희공(僖公)이 말을 잘 기른다는 걸 칭찬하면서 나온 말입니다.


“삿된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 말(馬)은 그저 힘차게 앞으로 치달리네.(思無邪, 思馬斯徂.)”


그렇습니다. 삿된 생각이 없으면 말(馬)도 힘차게 달리지만, 사특한 생각이 없으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言)도 힘차게 뻗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삿된 생각이 없음, 바로 그것이 동심일 수 있습니다.


동심은 하얀 것을 하얗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렇게 말하려면 어른들은 용기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검은 것을 검다고 말할 수 있음이 동심입니다.


(아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아이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아이’란 눈치 볼 줄 모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를 의미합니다. 세상 물정 아는 아이라면? 물론 그 아이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우리 생각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입니다. 친구를 사귀려고 해도 눈치가 빨라야 하고, 어른 맘에 들기 위해서도 세상물정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눈치 빠른 아이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막상 영악한 아이를 만나면 ‘얘는 아이 같지 않은데!’라며 혀를 차곤 합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말하고, 하고 싶으면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동심입니다. 그저 ‘아름다운 마음’이 동심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이 마음이라고 해서 항상 아름다운 건 결코 아닙니다.


후환이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거나, 한 수 앞, 두 수 앞, 열 수 앞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것은, 동심이 아닙니다. 계산하지 않고 말할 수 있음, 정의롭지 않은 상황에서 “그건 공평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음, 그게 동심입니다.


그렇게 보면, 동심은 순수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티 하나 묻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흠결 하나 없는 아름다움은 아닙니다. 오히려, 포장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순수함에 가깝습니다. (날 것의 순수함은 때로는 위험할 수도 때로는 무모할 수도 있습니다.)


화나면 화난다고 말하는 것이 동심입니다. 다음은 김용택 님의 시, “콩, 너는 죽었다” 가운데 일부입니다.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1998: 92쪽)


최연철, 2024. 2. 16. (Midjourney로 그림)


어떤가요? 아이의 마음이 느껴지나요?  다음은 소설가 이병천 님이 김용택 시인의 시에 부친 글 가운데 일부입니다.


자기가 애써 붙잡으려는데도 불구하고-콩 농사야 누가 지었든, 굴러가는 콩알 하나가 쥐구멍으로 쏙 숨어 버렸다는 사실이며 그걸로 인해 약이 바짝 올라 ‘너는 죽었다’고 외치는 동심 때문이다. (...) 그야말로 콩 하나만 굴러가도 배꼽이 드러날 만큼 깔깔거리며 웃거나 ‘너는 죽었다’고 팔을 걷어붙이는 영락없는 ‘아이’이기도 한 것이다. (김용택, 1998: 114쪽)


위의 글은, ‘아이의 동심’이 아니고, ‘김용택 님의 동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제가 생각하는 동심을 잘 표현한 글이라고 생각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김용택(1998). 콩, 너는 죽었다: 김용택 동시집. 서울: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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