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미술관의 수강생입니다.
도대체 미술이 무엇이길래, 문턱을 넘기 어려운 기분이 드는 걸까.
미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미술관에 가면 나는 늘 이방인이었다.
붓 터치며 색감, 구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멋지다', '예쁘다' 이상의 말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미술에 대한 해석이 부족해서일까? 감상을 나누고 싶어도 마치 벽이 있는 듯했다.
미술 전공자가 아닌 나에게 미술은 그렇게 언제나 문턱이 높고, 어렵기만 했다.
그러다 한권의 책을 읽은 후, 나도 꼭 미술을 공부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 책은 바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치 한 발 한 발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미술관이 단순히 그림이 걸린 공간이 아니라, 그림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성소라는 걸 깨달았다. 미술관이 그러한 하나의 세계라면,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 미술관 쪽으로 기웃기웃하게 되었다.
주인공의 어두운 심연에서 조용히 흐르는 급류처럼, 내 마음도 요동쳤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좋은 기회를 발견했다.
내가 사는 지역의 한 미술관에서 도슨트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미술 강의를 연다는 공고였다.
그런데 오늘이 마감이라니!! 이런 멋진 발견을 한 나의 손과 눈을 칭찬했다.
'선착순이네!!! 마감일이 오늘이라니! 선착순이라면 이미 끝났을 가능성이 높지만, 혹시라도 빈자리가 남아 있지 않을까?'
망설일 새도 없이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신청완료]
그러곤 한참을 핸드폰을 바라봤다. 설마 자리가 남아 있겠어?
그런데 몇 시간 후, 문자 한 통이 왔다.
[내일부터 수업이 시작되니 미술관으로 오세요]
한 통의 문자였지만 내게는 예쁜 색지로 정성껏 만든 아름다운 초대장처럼 보였다.
'와 진짜 됐다!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드디어 내게도 새로운 스케줄이 생겼다!!'
하나의 스케줄도 소중할 정도로 무료했던 나날. 실업자의 비애이면서도, 행복이랄까.
그래. 난 미술을 사랑해.
여행을 가면 꼭 미술관에 들르고, 예술을 감상하는 걸 좋아했는데…
그런데 왜, 나는 미술을 어려워했을까?
어쩌면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빛을 받아 명암이 생긴 사과를 그려오라는 초등학교 숙제.
도대체 빛이 부딪히는 부분이 어디지? 선생님은 그림자는 자연스럽게 흐르게 그리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과를 한참 노려보다가 결국 연필을 내려놓고 오빠에게 대충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TV나 봤다.
'이건 나랑 안 맞아'
가르쳐주는 사람도 유튜브도 없던 초등 5학년의 나에겐 나름 거대해서 어떻게 쪼개서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날 이후, 미술 시간은 나에게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그러다 화해를 하게 된 것은 성인이 훌쩍 지나고나서였다.
회사 생활이 버거웠던 어느 날, 뭔가 탈출구가 필요하던 차에 직장 근처 미술학원에 등록해버렸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미추어버릴 것 같은 그 때였다.
처음엔 설렜다. 커다란 화실 가방과 새 스케치북, 수채화 물감과 붓을 받아들고선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시작된 나의 화실 생활... 그런데 현실은 달랐다.
친절하게 한선 한선 가르쳐줄 줄 았았는데,
"자, 저기 있는 꽃병에 꽂힌 장미를 그려보세요."
어리둥절한 채 펜을 들었지만, 그려본 적 없는 나의 그림은 초등학생도 비웃을 수준이었다.
분명 처음 상담 갔을 때는 멋진 남자 선생님이 간이며 쓸개며 다 빼서 가르쳐 줄 것 같이 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자 그 선생님은 온대간대 없고 미대에 다닌다는 아르바이트생이 돌아다니며 한마디씩 건네고만 갔다.
결국 한 달도 안 되어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일까. 나도 미술과 관련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남았다.
그다음으로는 도전한 것이 푸드드로잉이었다 .
'그래, 나는 요리 전공자니까 음식이라면 좀 더 자신 있지 않을까.'
수업 장소가 감성 넘치는 연남동의 한 카페라는 점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곳에서, 미술을 배운다고? 게다가 강사는 서울 소재 대학의 교수님!'
왠지 느낌이 좋았다. 그 느낌 그대로, 수업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로마에서 시작해 파리로 갔다가 뉴욕으로...교수님의 설명은 마치 한편의 여행기처럼 마음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나 그림이었다. 나는 또다시 그림과의 싸움에 부딪혔다.
내가 그린 빵은 폭신한 식감 대신 돌덩이처럼 굳어 보였고, 크루아상은 바삭함이 아니라 흐물흐물해보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나보다 더 못그리는 친구가 함께였다.
"그래도 네 그림이 좀 낫다. 아니 이거 어떻게 그린거야. 너 좀 한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한 수업, 한 수업을 버텨냈다. 비록 푸드드로잉으로 대단한 실력을 쌓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경험은 미술과 나 사이의 거리를 조금 줄여준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다시 도전하려 한다.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엔, 정말로 미술의 세계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가 보고 싶다.
이 초대장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