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재개발 전의 흑석동을 아시나요

by 이가령

갑자기 버스를 타고 옛날에 살던 동네에 가 본 적이 있다. 재개발 공사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확히 왜 그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 집에 갔더니 엄마가 울고 있었거나, 대학교 입학사정관이 나의 갸륵한 포트폴리오를 정성껏 검토해 줄지 너무너무 걱정됐거나, 남동생과 싸웠을 것이다. 나를 도망치게 하는 일은 대부분 그런 것들이었다.


무작정 나와 옛날에 살던 집에 가기로 결심했지만, 이사간 지 오래라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마저 가물가물했다. 어찌어찌 버스에 올라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은 곳에 내렸다. 그러자마자 나를 맞이한 것은 가로등 하나만이 휑하게 서 있는 웬 어두컴컴한 골목이었다.


‘여기 원래 이랬나?’


원래 이렇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쯤이면 퇴근하거나 산책하는 사람이 많았다. 좁은 골목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던 어른들. 골목 초입의 동네 빵집에서 사라다를 빵빵하게 넣은 샌드위치를 고르던 사람들. 별다른 할 일 없이 어슬렁어슬렁 산책을 하던, 어린 내 눈에 조금 무서워 보였던 아저씨들. 그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 걸어다녀도 되는 건 맞겠지?’


절로 의구심이 들었다. 사람이 없는 데다, 골목 오른쪽은 죄다 공사 중인지 알록달록한 덮개로 가려져 있었으니 당연했다. 덮개 옆으로 비죽 튀어나온 동그란 쇠 막대도 보였다. 이 공간의 모든 요소가, 심지어 조용히 덮인 어둠마저도 불안했다.


‘이 정도면 마을버스 정류장도 폐쇄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반대편으로 건너가서 다시 버스에 오르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 봤자 도망치고 싶은 현실만 나를 기다릴 텐데.


보기에만 이렇지, 아직 근처에 사는 사람도 많을 테고 가다 보면 눈에 익은 공간이 나와 안심도 되지 않을까 애써 나를 달랬다.


그러나 한 걸음씩 갈 때마다 무서움이 커졌다.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 홱 뒤를 돌아보면 줄지어 선 가로등만 보였다. 그 주황 불빛 아래 내 그림자는 유독 길고 짙어져 있었다. 공사장 덮개 너머에 누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동네 전체가 이런 상태라면 가 봤자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사실도 피부를 따끔하게 찔렀다.


결국 나는 10분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걸어 올라갔던 골목길을, 그보다 두 배 빠른 속도로 돌아 내려왔다. 내려올 때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았다. 다시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에 탔을 때, 나는 조금 헐떡이고 있었다.




그날, 돌아가기 싫은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가 20년 가까이 살았던 동네는 이제 없다는 것을. 지도상에는 그대로 있을지 모르지만, 거기 살던 이웃들과 친구들과 풍경들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버스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그 동네에 살았던 이들의 안부를 궁금해했다. 엄마 아빠가 도망가서 할머니랑 살던 정민이, 정석이 형제는 어디로 갔을까. 구멍가게 할머니는 다른 곳에서 새 장사를 하고 계실까. 중학생이 되자마자 새침하게 날 모르는 척했던 소영이 언니는 지금쯤 몇 살일까. 그 사람들도 문득 여기 다시 와 보고 싶어지는 날이 있을까. 혹시 이미 왔다가 간 건 아닐까?


뭐, 왔어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직접 보고 알게 됐으니 미련없이 잊어버릴 법도 한데, 이상하게 때때로 그 동네 생각이 났다.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고, 나날이 흐려져 가는 기억이 아쉽기도 했다.


‘기억이 더 사라지기 전에 글로 써서 남겨야겠다. 나 혼자라도 그 시절의 그 동네를 기억해야겠다.’


그렇게 다짐하고 몇 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 동네에 대해서 할 말이 남기는 했을까, 이 글이 의미가 있을까, 혹시 왜곡된 기억을 담아내는 것은 아닐까, 아무 가치가 없는 기록에 힘만 빼면 어쩌나, 고민이 많았고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이토록 오래 내 머리를 간질이는 주제라면, 종국에는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으로 판명나더라도 일단은 써 보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옛날옛적 흑석동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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