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혼자 짐 들고 올 수 있겠어?”
엄마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첫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었다.
설레는 방학식 날! 나도 이제 초등학생이고, 무려 여름방학이라는 걸 한다니! 그 사실이 너무 기뻤던 나는, 책상 서랍과 사물함 속 짐이 얼마나 많은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대답했다.
“응!”
그것은 엄청난 오산이었다. 책상 서랍만 비웠는데 가방이 꽉 찼다. 나는 사물함에 쌓인 교과서와 소설책, 쓰고 남은 온갖 준비물들을 어쩌지 못해 쳐다만 보고 있었다.
“가령아, 미리미리 갖다 두지 그랬어. 일단 여기다 담아.”
엄격하셨지만 내게는 유독 상냥하셨던(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담임선생님이 날 발견하고 커다란 비닐봉투 두 개를 빌려주셨다. 나는 일단 거기에 사물함 속 모든 물건을 무질서하게 쑤셔 넣었다. 짐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었다.
“허억, 허억.”
아직도 그날의 귀가길이 기억난다. 머리카락 사이로 관자놀이를 타고 쪼르륵 흐르던 땀. 비닐봉투 손잡이가 점점 얇아지면서 날카롭게 손가락을 파고들던 아픔. 그래도 어떻게든 학교 근처를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는데.
“헉!”
힘들어서가 아니라 막막해서 숨이 터졌다. 까마득한 오르막길이 내 앞을 가로막은 그 순간에 말이다.
당시 우리 집은 거의 산꼭대기에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려면 야트막한 오르막 하나, 가파른 오르막 하나, 그 뒤에 이어지는 계단 스물 몇 개, 계단이 끝나자마자 다시 시작되는 또 하나의 살벌한 오르막 하나까지 지나야 했다.
‘못 올라가.’
책가방 끈은 이미 어깨를 파고들다 못해 자국을 낼 것 같았고, 비닐봉투 손잡이에 손가락이 잘릴 것 같았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바닥에서 손들이 쑥 튀어나와 온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부끄럽게도 나는 엉엉 울고 싶었다. 힘들기도 힘들었고, 친구들을 마중 나와 있던 엄마 아빠들도 떠올랐다. 그렇게 눈물이 찔끔 나오려던 때였다.
“가령아. 집에 가?”
뒤를 돌아봤다. 옆집에서 하숙하는 오빠들 중 하나였다.
당시 우리 옆집에는 중앙대학교에 다니는 하숙생 오빠들이 둘 살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숙이 아니라 자취였다. 그렇지만 엄마는 내 앞에서 그 오빠들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들을 ‘옆집 하숙생 오빠들’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속으로 그들을 ‘하숙생 오빠들’이라고 불렀다.
이러나저러나 나와는 접점이 별로 없는 이웃이었다. 당시의 나는 키 큰 어른 남자라면 가리지 않고 무서워했기 때문에, 가끔 오빠들이 말을 붙여도 고갯짓으로만 꾸벅하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들어 줄게.”
친한 사이도 아닌 오빠가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이, 오빠는 내 어깨에서 책가방을 벗겨 자기가 메고, 비닐봉투 두 개도 가져갔다. 내 손에서는 온 세상의 무게처럼 무겁던 것들이 오빠의 손에선 작고 가벼워 보였다.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두 손이 갑자기 너무 가벼워져서 허전할 정도였다.
“오늘 방학했어?”
오빠는 올라가는 동안 대단찮은 말을 몇 마디 붙였고, 나도 용기를 내서 “네.”라고 대답했다. 오빠는 비닐봉투를 몇 번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가령이가 들긴 너무 무거웠겠네.”
짐이 사라지자 집까지는 금방이었다. 오빠는 우리 집 문 앞까지 짐을 들어다 줬다.
“잘 들어가.”
감사합니다. 덕분에 집까지 왔어요. 그렇게 인사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인사치레가 아니라 정말 고마웠다. 그런데, 그 한 마디를 하기가 왠지 너무나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래서 속삭이듯이 “네.”라고 대답한 다음, 고맙다고 인사조차 하지 않고 집으로 쏙 들어와 버렸다.
오빠에게 고맙다는 말도 전하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가끔 집 앞에서 마주치면 ‘저번에 고마웠다고 인사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렇게 오빠들은 어느 날 이사를 갔다. 햇볕이 들던 주말, 오빠들이 이사 가던 풍경이 떠오른다.
“안녕.”
오빠들은 그렇게 인사하며 손을 흔들고, 잘 가라고 배웅해주러 나왔던 우리 엄마와도 몇 마디 대화를 했다. 그러고선 가 버렸다. 나는 아직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는데.
시간이 흘러,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에 짓눌려 오르막 초입에서 왈칵 울음을 터뜨릴 뻔했던 초등학생은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 이제는 짐이 너무 많을 것 같으면 며칠에 나눠 가져가는 요령도 생겼고, 도움을 받으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도 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거운 걸 들고 가는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이 되었다. 커다란 짐을 질질 끌면서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손이 나간다. 한 번은 너무 빨리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드릴까요?”라고 묻지도 않고 냅다 짐을 들어버려 당황스러운 눈빛을 받기도 했다.
짧은 거리나마 짐을 옮겨 주고 나면 사람들은 늘 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혹은 “고마워요.” 혹은 “아이고.”
나도 늘 마주 대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도 아니고, 내가 도와줘 놓고 왜 감사하다고 하는 거지? 스스로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알 것 같다. 내 감사 인사는, “어린 날 받았던 도움을 갚을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라는 뜻이었음을.
내가 착한 사람이어서 남의 짐을 잘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냥 옛날에 전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조금 가뿐해지는 사람. 너무 늦은 감사 인사가 바람결에 오빠에게 닿기를 바라는 사람.
이름이 기억 안 나는 오빠에게. 가파른 오르막이 내 앞을 가로막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짐에 짓눌려 있던 그날, 잠시 빌려준 오빠의 호의가 나를 집까지 데려다 줬어. 쑥스러워서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지만, 오빠 덕분에 나는 남의 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으로 살아가.
그러니까 오빠의 삶에도 오빠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기를. 짐을 나눠 들어 주는 친구와 이웃이 있기를. 인생이 미소 짓는 날, 내가 길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오빠와 마주치고, 그 아저씨가 옛날의 그 오빠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로 “도와드릴까요?”하고 묻기를. 그렇게 가파른 계단을 옛날의 어느 날처럼 같이 걸어 올라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