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아빠 친구

by 익수정


화면 속 숫자는 여전히 1,100만 원에 멈춰 있었다. 못해도 1,500은 받을 수 있을 거라 했다. 호언장담하던 1,500만 원. 중고차 사이트 어디에도 그런 숫자는 없었다. 아버지가 말한 현실과 나의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400만 원의 간극.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만들어낸 무지와 허풍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더 이상 지루한 과거사를 떠올리는 건 사치였다. 푸념을 뱉는 대신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숫자는 그대로였다. 눈앞에서 증발해 버린 400만 원. 이제는 그 사실만이 나에게 남겨진 유일한 진실이었다.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진동음과 함께 핸드폰 화면 위로 낯익은 번호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반사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뜨겁게 달궈진 핸드폰의 열기로 언저리가 화끈거렸다.


“여보세요.”


“민호니?”


핸드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며칠 전 나에게 면회를 가 보라고 했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 네.”


“어~ 얼마 전에 전화했던 아빠 친구인데~”


“아, 네. 기억나요.”


“아빠한테는 다녀와 봤니?”


“네, 그날 바로요.”


“그랬구나~ 아유~. 아빠가 잘해보려고 했는데, 일이 생각대로 안 풀리다 보니 그렇게 됐어~ 민호가 좀 이해해 줘~.”


이해라는 말에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나는 대답 대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릿한 통증이 미간을 따라 눈두덩이까지 퍼졌다.


“민호가 고생이 참 많네. 밥은 먹었니?”


질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안부를 묻기에 우리는 너무 낯선 사이였고, 지금 내 처지는 안부 따위로 수습될 수준이 아니었다.


"네. 먹었어요."


“그래, 잘했다. 지금 집이니? 다른 게 아니고 아줌마가 너한테 뭐 줄 게 있어서 그러거든? 아빠가 부탁한 것도 있기도 하고."


'아빠'라는 단어가 수화기 너머로 생경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생각에 잠길 틈도 없이, 여자는 내 대답과는 상관없이 자기 할 말만 남기고는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 화면은 다시 아까의 중고차 거래 사이트로 돌아와 있었다. '30분 뒤면 도착할 테니 집 앞으로 나와 있으렴.' 집 주소를 묻지도 않았다. 마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뜨거워진 핸드폰 화면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가죽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어 앉았다. 엉덩이가 푹 꺼진 소파는 딱딱했고, 해진 가죽에 허벅지의 살이 쩍하고 달라붙어 끈적거렸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니 벽에 거뭇한 얼룩 하나가 보였다. 벽지에 핀 곰팡이였다. 검푸른색의 곰팡이는 벽지 여기저기에 먹물처럼 번져있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곰팡이를 관찰했다. 진하고 흐릿한 경계는 어디서부터가 검은색이고 어디까지가 푸른색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아버지가 구치소에 있다는 걸 먼저 알고 있었던데다가 집 주소까지 꿰고 있는 여자.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어느새 곰팡이는 거실 전체에 퍼져있었다.


여자가 말한 대로 시간에 맞춰 집 앞의 주차장으로 나갔다. 잿빛 시멘트 바닥에 칠해진, 오래된 주차선이 간신히 그 형태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아파트 입구 쪽에서 노란색 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광택을 내뿜는 선명한 노란색에 눈이 부셨다. 점점 가까워질 때마다 노란 자동차는 더욱 밝게 빛이 났고, 내 앞에 멈춰 섰을 때는 눈 안쪽이 시릴 정도로 따가웠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멈춰 선 자동차 쪽으로 다가갔다. 운전석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내렸다.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와 높은 구두, 귀밑에서 찰랑거리는 커다란 금색 귀걸이까지… 걷고 있던 발걸음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여자는 어느새 차 옆에 서서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손목에 찬 금속 팔찌들이 서로 부딪치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낡아빠진 주차장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불협화음이었다.


"민호니? 반갑다~. 덥지? 일단 차에 타~"


여자가 머리에 걸쳐 놓은 선글라스를 집어 들며 말했다. 여자가 가리킨 선글라스의 끄트머리는 조수석을 향해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여자가 말한 대로 차에 탔다. 자리에 앉아 차 문을 닫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타고 진한 화장품 냄새가 풍겨왔다. 저렴한 분내는 비릿한 냉기와 뒤섞여 속을 메스껍게 했다. 여자는 자신을 '황미숙'이라고 소개했다. 아버지의 '친구'라고 했다.


"아빠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민호가 걱정이 많겠다, 아빠가 거기 들어가 계셔서… 아줌마는 아빠 관련해서 이거저거 도와주고 있어. 오늘도 아빠 면회 다녀오는 길이구… 그때 아줌마가 연락한 건 민호도 이제 성인이고 하니까 이런 건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랬어. 사실 아빠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했거든… 아빠가 지금 무슨 상황인지는 민호도 대충 알지?"


"아, 네…"


울렁거리는 속을 간신히 참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된 상황이니까, 민호가 진호 잘 챙겨서 같이 밥 먹고 그래. 동생 이름이 진호 맞지?"


"네."


"응, 그래. 그리고 뭐 물어볼 일 같은 거 있으면 아줌마한테 연락하고. 아빠가 대충 집 사정은 다 얘기해줘서 아줌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거든? 그러니까 편하게 아줌마한테 얘기해. 맞다, 자동차는 팔았니?"


여자는 자동차를 언급하며 내 쪽으로 몸을 획하고 틀었다. 자동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화장품 냄새가 한층 진하게 코를 자극했다. 이제는 약간의 두통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뇨, 아직… 아버지가 말한 거랑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요. 어딜 봐도 1,500이 아니라 1,100이던데…"


"아, 그래? 그럼, 아줌마 아는 중고차 딜러 하나 있는데 소개해 줄게. 아줌마한테 소개받았다고 하면 가격은 무조건 괜찮게 잘 받을 수 있을 거야."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나는 힐끗하고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아까부터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짙은 화장이 마치 가면처럼 얼굴 위에 덧발라져 있었다. 원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예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짙은 화장을 했다 한들 자글거리는 주름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내 속을 메스껍게 하는 이 빌어먹을 화장품 냄새도, 정체 모를 의심도 도저히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끊길 전기와 가스비 앞에서는 모두 무의미한 것들이었다. 나는 헛구역질을 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비굴한 기대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네. 감사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여자는 쥐고 있던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 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일정한 박자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어색한 침묵. 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근데 민호야, 너 혹시 최경자라는 사람 아니?"


침묵을 깨고 여자가 낯선 이름 하나를 툭 하고 던졌다. 운전대를 톡, 톡, 하고 두드리던 소리는 어느새 멎어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돌연 무겁게 가라앉았고, 여자는 내 입에서 나올 반응을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아뇨. 처음 듣는데요."


"그래? 아빠 친구라고 하던데, 혹시 너도 아나 싶어서 물어봤어."


여자는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셔츠 깃에 꽂아두었던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시커먼 렌즈에 내 얼굴이 비쳤다. 그 너머의 시선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자는 조용히 무릎 위에 놓인 손가방에서 하얀 봉투 하나를 꺼냈다. 가방에는 인터넷에서 본 적 있는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득였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을 것 같은, 이질적인 광택이었다.


"얼마 안되는 거긴 한데 일단 받아둬. 아줌마가 민호가 너무 아들 같고 그래서 주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쥐여주었다. 손에 닿는 까끌까끌한 봉투 표면의 감촉이 에어컨 바람에 맞닿아 더욱 거칠게 느껴졌다.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하고는 주머니 깊숙한 곳에 봉투를 집어넣었다.


"그래, 아줌마가 또 연락할게. 잘 지내고. 알았지? 아줌마는 또 어디 들러야 할 데가 있어서… 인제 그만 가 봐야 할 거 같아."


"네."


짧은 대답과 함께 한 번 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주차장의 뜨거운 열기가 비린내 나는 에어컨의 냉기를 밀어내며 들이닥쳤다. 후텁지근했지만 오히려 상쾌한 기분이었다. 황미숙 아줌마의 노란색 자동차는 희뿌연 매연을 뒤로하고 눈앞에서 점점 멀어져갔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머니 속의 봉투를 꺼내 열어보았다. 안에는 봉투만큼이나 빳빳한 초록색 지폐 10장이 들어있었다. 10만 원. 정체 모를 부채감에 불안이 엄습했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나에게는 비루한 부채감과 불안보다, 당장 10만 원의 현실이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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