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너의 일상은 무엇이냐- 고래군
흐림과 맑음이 교차하는 날들을 살아내고 있다. 어슴푸레한 빛으로 간신히 몰아낸 어둠 속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잠이 들면,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을 뜨며 또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를 마치고 또 하루를 살면서, 문득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지금 이곳에서, 너는 무엇이냐?'
한 달을 살기로 하고 이곳에 왔다. 원래 살아내어야만 했던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일상을 꿈꾸며 이곳 리스본에 왔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일상'이란 어떤 일상인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아마 위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던 모양이다. 지금 이 도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무엇으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냐는 물음 말이다.
아마 우리는 '여행자'로서 지금-여기를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여전히 우리의 의식은 이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떠나기 전 잠시 머물고 있는 단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아마 그렇다고 한다면, 리스본에서 우리가 살아내어야 하는 일상에는 어쩌면 '여행자의 일상'도 어느 정도 포함되어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길을 나선다.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구매했던 (종이로 만든) 교통카드에 '1일권'-정확히는 스물 네 시간동안 유효한-을 충전해서 말이다.
"오빠, 이건 말이지 일단 처음 교통카드를 쓰고 나서부터 24시간동안 쓸 수 있는 거야."
"그럼 이따가 처음 찍고 나서 시간 확인해둬야겠네?"
"응. 그러니까 지금 낮 열두 시 정도니까, 내일 오전에도 어딘가를 갈 수 있는 거야.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내일까지 쓰면 제일 효율적으로 쓰는 게 되는 거지."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나는, 아니 우리는 리스본의 명물이라는 28번 트램을 타본 적이 없다. 리스본 하면 일단 떠올리는 바로 그 노란색 트램 말이다. 일단 그녀나 나나 어지간하면 걷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차비를 아껴서 뭐라도 하나 더 사먹자는 마음가짐도 선뜻 트램에 올라타는 것을 망설이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스물 네 시간 패스를 끊은 김에,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그것부터 타보기로 했다. 아아 오늘은 알파마Alfama 꼭대기에서 오르내리는 등산을 쉬는구나… 그런데 이거 어디서 타는 거지? 일단 우리는 눈에 띄는 정거장에서 트램을 기다렸다. 전광판에 트램 도착까지 남은 시간도 표시되는 걸 보면 아마 여기서 타는 거겠지 했던 거다. 머지 않아 낡고 오래된 노란색 트램이 우리를 향해 '땡땡!!'소리를 내며 다가왔고, 그리고 '덜컹덜컹'소리를 내면서 지나갔다.
잠시 멍하니 뒷꽁무니를 쳐다보는 우리를 남겨두고, 트램은 좀 더 멀리 저쪽에 가서 섰다가 금세 떠나버렸다. 씩씩거리면서 우리는 그 자리로 갔다. 이제 보니 팻말 꼭대기에 정차하는 차량 번호가 적혀있다.
"이제 보니까 서는 자리에 트램 번호가 적혀있네."
"우리가 타봤어야 알지 뭐…."
"그나저나 항상 걸어다니던 길에서 뭘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적응 안 되네."
"그러게요. 아 저기 온다!"
한동안 기다린 우리 앞에 도착한 뒷차. 그런데 다소 한산했던 앞차와는 다르게 이번 차에는 사람이 좀 바글바글하다.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에이!! 우리가 무슨 28번 트램이야! 오빠 이따가 올라올 때나 타자."
"그래! 걷다가 안 걸으려니까 좀 어색하더라! 가자 가자!!"
#2. 삼 월의 첫 번째 일요일- 고래군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것도 3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다. 그리고 어제 잠들기 전 그녀가 이것저것 검색해보다가 일요일에는 박물관과 미술관 입장권이 무료라는 점을 알아내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은 매 달 첫 째 일요일만 무료) 우리가 갑자기 리스본 하루 교통권을 끊은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선 제로니무스 수도원Mosteiro dos Jerónimos을 향해 길을 나섰다. 저번에 리스본에 왔을 때, 입장권을 사야 한다는 표지판이 텅빈 호주머니의 우리를 되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수도원 앞에 내렸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길고 긴 줄의 뒤로 모두 몰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일단 나를 줄에 세워두고, 상황을 살펴본다며 입구쪽으로 향했다. 하늘은 흐리고, 이슬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빗방울들이 사람들의 어깨 위에 흩뿌려지고 있었다.
"오빠오빠!!"
"나 여기 있어!!"
"이 줄은 성당 입구 들어가는 줄이야. 우린 회랑으로 가자. 거긴 줄 안 서있어."
"응? 뭐가 다른데?"
"교회는 원래 무료야. 우리가 오늘 가려는 데는 회랑이고. 거기가 입장료 있는 데란 말이야."
"그럼 이 사람들은 왜 여기 서 있어?"
"우리처럼 모르고 일단 줄 선 거지 뭐. 얼른 가요 우리. 교회는 회랑 보고 나서, 나중에 가도 돼."
다음으로 향한 곳은 굴벤키안 박물관Museu Calouste Gulbenkian이다. 건축물들도 인상적이었지만, 도심 한 가운데에서 커다란 공원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우리가 이 곳에 도착한 것은 대략 오후 두 시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인가? 전시관들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2층에 있는 어떤 미술전시관은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선 줄이 계단을 지나, 건물 1층 가장자리를 따라 건물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다소 질린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 그냥 보지 말자."
"응? 왜요? 나야 예전에 봤던 거라 괜찮기는 한데, 오빠는 안 봐도 괜찮겠어?"
"응. 이거 기다리다 오늘 하루 저물겠다. 그냥 산책이나 좀 더 하자."
"나 저번에 왔을 때는 오전이라 그랬나? 사람 거의 없었는데…."
"그나저나 나 커피 마시고 싶어."
(전시 내용 등은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될 것 같다. (https://gulbenkian.pt/museu/)
#3. 사는 모습 엿보기 - 미니양
굴벤키안 박물관을 나서 시내에서 벗어난 대형마트에 가보기로 했다. 집 앞에 있는 작은 슈퍼 말고, 이 곳의 대형마트는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에 아무런 정보도 없이 무작정 구글맵이 이끄는대로 찾아가보기로 했다. 구글맵을 보면 근처에는 이케아도 있고, 다양한 쇼핑몰도 있어보였다. 구글맵만 믿고 무조건 가보자고 길을 나서는 나나, 그런 나를 아무 말도 없이 따라오는 고래군 우리 둘다 그닥 정상적인 여행자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만약 찾아가다 못 찾겠거나, 가기 싫어지면 다시 되돌아오면 되니까 자신감있게 길을 나섰다. 그런 면에서 24시간 무제한 교통권을 가진 우리는 아쉬울 것이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어느 역에 내려 버스를 갈아타고 가라고 구글맵님은 말씀하셨다. 지하철 역에 내렸는데, 그 곳에도 쇼핑몰이 있었고, 그 안에 대형마트도 있었다. 순간 발동한 귀차니즘!
"오빠! 여기에도 대형마트가 있대."
"응? 그래?"
"응! 우리 거기 가지말까? 피곤한데?"
"그러지, 뭐."
고래군은 언제나 내가 하자는대로 거의 다 맞춰준다. 가끔 고약해지는 것만 빼면 참 잘 맞춰주는 사람이다. 우리가 내린 지하철역은 포르투갈 축구팀 벤피카 홈구장이 있는 Colegio Militar/Luz역이었고, 우리가 간 곳은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었던 Colombo라는 쇼핑몰이었다. 쇼핑몰에 들어서자 꽤 많은 사람들과 많은 브랜드들이 입점해 있었다. 우린 처음부터 다른 매장보다 대형마트가 궁금했으므로, 지하에 위치한 Continente라는 슈퍼로 들어갔다. 우리나라 이**나 홈***만큼 큰 이 곳은 정말 많은 제품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한국에 있는 대형마트라도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발길 닿는대로 눈길 닿는대로 그냥 구경을 했다. 이 곳 사람들은 뭘 먹고 사나, 뭘 입고 사나, 뭘 쓰고 사나... 리스본에서 재래시장은 몇 번 가봤지만, 이런 최신식(?) 대형마트는 처음 와봤다. 쓱 둘러보다보니, 사용하고 먹는 종류만 다르지 사람 사는 모습은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시장을 둘러보는 것처럼, 진열된 물건이나 다른 사람 카트에 담긴 물건들을 보니 재미있었다.
그리고 대형마트를 찾아가고 싶었던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포르투갈에서 유명하다는 Couto치약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알파마지구 관광상품 파는 곳나 타임아웃마켓에서는 본 적 있는데, 유명한 치약이면 혹시 대형마트에도 있지 않겠지 싶었다. 치약을 몇 개 사서 한국에 있는 친구들한테 선물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Couto치약은 없었다. 그 뒤로 다른 슈퍼나 다른 약국에도 들어가봤지만 그 치약은 찾을 수 없었다. 사가지고 갈거면 그냥 관광상품 파는 곳에서 사야되나 보다.
혹시 관광객들한테만 유명한 거 아냐?
여담 하나)
대형마트에서 계산대에서 계산하는 직원이 우리에게 물어본다.
"너네 한국에서 왔어?"
"응."
"나 한국을 알아."
"어떻게?"
"KBS World 채널을 자주 봐. 특히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좋아해."
"아기들 참 귀엽지?"
그 얘기를 하는 직원의 표정이 아주 환하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계산대 앞이고 정작 나는 TV를 많이 안봐서 '슈퍼맨이 돌아왔다' 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얘기가 없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