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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Jun 11. 2018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대 가부장제의 종언


  프랑스의 스릴러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2018년 6월 21일 개봉한다. 원제인 ‘Jusqu'à la garde’는 ‘지켜내기까지는’ 정도인데, 아무래도 한국어로 그대로 번역하자니 어감이 잘 안 와닿기 때문인지 지금과 같은 한국어 제목을 가지게 된 듯하다. 뭐 미국에서는 ‘Custody(양육권)’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으니, 차라리 한국 제목이 더 좋아 보이기는 한다.     


 배우 출신의 감독 ‘자비에르 르그랑Xavier Legrand’은 이 영화로 작년 제7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황금사자상은 기예르모 델 토로의 <더 셰이프 오브 워터>가 가져갔다.     


 아들 ‘줄리앙Julien Besson(토마 죠리아Thomas Gioria 분)’과 딸 ‘조세핀Joséphine Besson(마틸드 오느뵈Mathilde Auneveux 분)’은 엄마인 ‘미리암Miriam Besson(레아 드뤼케Léa Drucker 분)’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베송 Besson’이라는 가족명을 붙게 만든, 이혼한 아버지이자 남편 ‘앙투앙Antoine Besson(드니 메노셰Denis Ménochet 분)’이 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며, 그만큼 폭력적인 남성이자 아버지인 앙투앙으로부터 미리암은 아들의 단독 친권을 얻어내고자 하지만, ‘법정’에서는 이를 거부한다. 딸인 조세핀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투표권을 가지는 성인이 되기 때문에 ‘친권’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다. 어쨌든 이후 앙투앙은 줄리앙을 겁박하여, 자신을 피하는 미리암의 소재를 알아내게 된다. 그리고 그의 집요한 폭력과 집착은 미리암과 줄리앙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게 된다.     


 여기에서 영화를 보는 두 가지 시선이 나타나게 된다. 첫 번째는 ‘좋은 가족은 중요하다’는 점일 테고, 두 번째는 줄리앙과 조세핀, 그리고 미리암이 ‘아버지의 이름’인 ‘베송Besson’을 정체성으로 삼을 것을 ‘법정’이 상징하는 ‘법과 질서’가 규정한다는 점이다.     



저런 남자를 만나면 안 돼   



 일단 독자 또는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곧바로 들게 될 생각은 ‘여자는 진짜 저런 남자 만나면 안 돼!’일 것이다. 뭐 실제로 남자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바깥으로 나가던 한 여성 관객이 정확히 저렇게 말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만큼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앙투앙을 통해 ‘폭력’을 섬뜩하리만치 잘 표현해낸다. 앙투앙은 커다란 덩치, 툭하면 소리 지르며 화를 내거나, 수렵을 즐긴다는 배경과 함께 자동차에 총을 가지고 다니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 영화가 빛나는 부분은 폭력이 조금씩 다가올 때의 긴장과 공포를 독자 또는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빛과 어둠, 소리와 침묵의 대비를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백미인 부분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이다. 미리암이 총격으로 너덜너덜해진 문을 닫으면서 영화의 서사가 모두 끝난 이후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독자 또는 관객은 갑작스럽게 숨 막히는 침묵 속에 갇히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 독자 또는 관객들이 함께 느꼈을 미리암과 줄리앙의 절망과 공포가, 이 순간 침묵을 타고 관객석으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지금 이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라고 말이다.     


 덧붙이자면, 따라서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갈 때까지 절대 잡담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차마 거기까지는 이해 못 했어요’라고 실토해버리는 모양밖에 안 되니 말이다. 대신 좀 더 질린 표정으로 그 침묵이 전달하는 묵직함을 느껴야만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제목처럼 말이다.     



친족관계, 혹은 아버지의 이름   


 이 영화를 읽거나 보는 두 번째 시선은 다소 철학적이다. 옆 나라 일본이나 유럽 여러 나라 등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여기에서 비롯된 ‘출산’에 의해 ‘가족’으로 묶이게 되는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을 자기 이름의 일부로 삼게 강제하는 ‘법’ 혹은 ‘친족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미리암과 줄리앙, 그리고 조세핀에게 ‘베송Besson’이라는 가족제도를 부여하고, 줄리앙의 양육권을 온전히 미리암에게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앙투앙과 ‘법정’으로 대표되는 ‘가족법’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제도를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깡Jacques Lacan은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세상에 던져진 이후 자아와 세상을 인식하고 언어를 습득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할 수 있는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무의식적으로 체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해하기 쉽게 정말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로 가지게 되는 ‘어머니를 향한 욕망’과 이를 금기로 결정하는 ‘아버지’에 의해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와 ‘거세 공포’에서, 주체인 자신에게 ‘금기’라는 기존의 ‘법과 질서’를 강요하고 억압하는 타자로서 ‘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모든 문화권에는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사회적 구조인 ‘친족관계’는 ‘근친상간의 금기’를 기반으로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결국 어느 문화권이든 사회 체계 안에서 태어나는 인간은 세상에 던져짐과 동시에 ‘친족관계’라는 거대한 구조에 강제로 편입되는 셈이다.     


 영화는 결말에서 건너편 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이 ‘앙투앙’의 폭력을 제지하고 체포해가는 서사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 구조는 꽤나 의미심장하다. 과거 ‘가부장제’ 아래에서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로서 한평생을 살았을 여성에 의해, 지금 시대의 ‘아버지의 폭력’이 종결되는 서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시각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제 현대 사회에서 ‘가부장제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했던 ‘엔딩크레딧의 침묵’의 의미가 더욱 무거워지게 된다. 영화의 이미지가 독자 또는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를 보고 있는 ‘당신이야말로 바로 그 질서와 제도 속에서 살고 있는 장본인은 아니냐’고 말이다.


사진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5750533&memberNo=22480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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