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김윤석이 어디 갔다!

<미성년>을 보고

by Chaeyooe



출처 = 씨네21 <미성년>


여자 넷에 남자 하나. 포스터에서 확연히 성비의 불균형이 보이는데도 미심쩍었다. 그 한 남자가 네 여자를 좌지우지하는 영화이겠거니 지레짐작했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각인된 중년 남성 배우의 첫 연출작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와 같은 경력의 배우들, 에단 호크와 조지 클루니, 나탈리 포트먼과 문소리는 본인들을 쏙 빼닮은 첫 연출작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성년>은 배우 김윤석 특유의 섬뜩함을 찾아볼 수 없는, 심지어 탄산수를 마셨을 때의 청량감까지 드는 영화였다.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출처 = 씨네21 <미성년>


교복 입은 우리가 나서야지

김윤석을 잘 아는 영화인들에게 김윤석다운 영화로 평가받는 <미성년>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는 맥주 한 캔 하는 어른들이 아니라 초코 딸기 우유를 나눠 마시는 여고생 둘이다.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는 급식 메뉴와 모의고사가 인생의 주요 사건일 나이에 부모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식들끼리 없었던 일로 하기에 윤아 엄마 미희(김소진)는 배부른 상태고, 미처 끊지 못한 전화 너머로 주리 엄마 영주(염정아)는 모든 걸 듣는다.


주리가 학원에서 낙태가 불법인지 검색하는 데 시간을 쏟다가 돌아온 집 거실에는 딸의 발 사이즈도 제대로 모르는 아빠이자 2년째 딴 방에서 자는 남편이자 덕향오리 김 사장의 휴대 전화에 마지막 사랑이라 저장되어있는 남자 대원(김윤석)이 있다. 평안히 두 집 살림을 이어오던 그는 윤아에게 ‘당신이 바람피우는 거 세상이 다 알아’라는 문자를 받고 나서야 지옥에 들어온다.


출처 = 씨네21 <미성년>


물 뿌리고 싹싹 비는 드라마가 아니다

유일한 남성이자 가정인 대원이 뒤늦게 합류했다고 해서 영화는 그에게 이야기의 주도권을 넘겨주지 않는다. <미성년>은 철저히 10대 여성인 주리와 윤아에 의해 진행되며, 중년 여성인 미희와 영주가 그들과 함께 간다. 이들은 상처 입은 본인을 가여워하고, 또 본인 외에 나머지를 미워하다가도 연민하면서 점차 회복해간다.


반면 대원은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을 기회도, 가장으로서의 체면을 살릴 방법도 얻지 못한다. 이 죄 많은 남자는 상행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내려가서라도 아이들에게서 도망치거나 빈방 문 앞에서 무릎을 꿇거나 어디서 피 날 만큼 맞고 들어온다.


대원 역할을 다른 배우에게 제안하기도 송구스러워 직접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감독의 말대로 대원은 네 여성 인물에게 긴장의 공을 패스해주는 역할로만 쓰인다. 남성을 아버지와 남편이란 이름으로 구원해주지 않고, 여성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미성년>은 어디서 본 불륜 소재 드라마의 전형성을 탈피한다.


출처 = 씨네21 <미성년>


부족해서 애틋한 김윤석의 여자 어른들

<1987>(2017)의 박 처장이 워낙 강렬한 캐릭터였기 때문일까. 권력과 폭력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방식이 김윤석의 영화에 잘 어울릴 것 같지만 <미성년>의 인물들은 생각보다 건전하게 당면한 일을 처리한다. (물론 대원은 논외다) 미성숙한 인간들이 총출동하는데도 이 영화에서 건강한 아름다움이 발산하는 건 그 때문이다.


영주는 미성년(美成年)에 가장 근사한 인물이다. 책임지기 위해 용기를 내기 때문이다. 고작 여행이나 가자며 아내에게 절절매는 대원과 달리 그는 주리와 살아갈 현실적인 강구책부터 세운다. 마르고 긴 목이 훤히 드러나는 단발로 자르고 나타난 영주는 우선 집을 내놓고, 방 안에 들어가 앉아 등기부와 통장 그리고 돌 반지를 모조리 꺼내놓은 채 머리를 싸맨다.


그러면서도 어른들이 친 사고에 아이들의 인생이 떠밀려 내려가지 않도록 챙긴다. 영주는 주리와 윤아에게 ‘싸우지들 마, 너희들이 왜 싸워’, ‘흔들리지 마, 지금이 너희들 인생에서 너무 중요한 시기야’, ‘너 잘못한 거 없어. 괜찮아’라고 똑똑히 말해준다.


출처 = 씨네21 <미성년>


남편의 아이를 낳은 여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영주는 자신이 밀어 넘어뜨려 미희가 조산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변명하지도 미희를 비난하지도 않고 그저 벌어진 사건을 꿋꿋이 수습한다. 미희의 병원비를 전부 계산하고 고해성사하러 다니고 전복죽을 쒀 문병을 간다. 오리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갈 때와 등교하는 딸에게 도시락을 건네고 돌아갈 때 잡히는 영주의 발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영주와 비교하면 미희는 언뜻 대책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대원이 기혼자임을 알면서도 만나고, 산후에 과자나 주워 먹는다. 하지만 그는 열아홉에 낳은 딸을 지금껏 혼자 키워온 엄마다. 오래간만에 자신을 찾아온 딸에게 자판기 커피값이나 뜯어내는 타지의 아버지와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여자다. 포기하지 않는 미희를 미워할 수 없다.


출처 = 씨네21 <미성년>


소녀들의 행동에 찬성표를

주리와 윤아는 어른들과 다르게 깨끗이 사건의 마침표를 찍는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인큐베이터 안에 있는 돈가스만 하기도 하고 오므라이스만 하기도 한 동생 ‘못난이’를 지키려 애쓴다. 좀 더 절박한 쪽은 윤아다.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고 누나도 되겠다’는 윤아의 외침은 동생만은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겠다는 결연함이 느껴진다.


자퇴까지 고려하며 보호자가 될 준비를 해나가던 윤아는 동생의 죽음으로 번아웃 상태에 빠지지만 그에게는 주리가 남아있다. 소녀들은 반지 상자만 한 곳에 담긴 못난이의 유골을 두 사람만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어떤 관객에겐 이들의 행동이 이 영화에 대한 불호를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응원한다. 그들은 지금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3명의 어른들이 외면한 현실을 아이들은 숭고하게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감독의 변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불편하고 안전하지 않은 엔딩을 더욱 아끼게 되었다.

(감독의 변은 「씨네21」, ‘<미성년> 김윤석 감독, 배우 김윤석과 영화를 찍었던 나홍진, 장준환, 홍지영 감독과 마주 앉다’에서 발췌했다)


출처 = 씨네21 <미성년>


내가 보기와 달리 ‘의외로’(웃음) 강한 남자들이 나오는 장르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씨네21」, [김윤석, 유해진]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더 치열한 작품이 나오면 좋겠다”)


그때는 웃어넘겼던 배우 김윤석의 말이 지금에서야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인지 실감한다. 감독 김윤석이 약한 남자들이 약한 채로 끝나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었으면 좋겠다. 행동하는 발을 가진 어른들도, 결국에는 환하게 웃는 아이들도 잔뜩 나온다면 더욱더 좋겠다. 나는 언제든지 그에게 배신당할 준비가 되어있다.




[chaeyooe_cinema]

미성년 Another Child

감독 김윤석



기분 좋은 배신감이 드는 중년 남성 배우의 탄산수 같은 감독 데뷔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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