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시에, 모레인 호수
레이크 루이스를 출발한 버스는 구불구불 난 도로를 따라 20분 정도를 천천히 달렸다. 중간에 휴대폰 속
Rogers(캐나다 통신사)라는 로고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굉장히 깊은 산속으로 들어왔구나 싶었다.
가끔 헤어지고 싶지만,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손 안의 작은 기계가 가장 자연스럽게 불통이 되는 곳,
캐나다에 오면 그런 곳에 한 번쯤은 오고 싶었다.
버스는 모레인 호수 입구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부터 300m 정도 되는 바위 언덕을 올라가면 호수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그 사실을 모르고 도착했지만, 이런 명소에서는 눈치껏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면 되기 마련이죠.
바위와 돌들이 거침없이 쌓여있는 언덕을 오르니, 눈이 조금씩 쌓여있는 산맥이 반짝이는 호수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록키 산맥에 위치한 대부분의 호수는 빛에 따라 색깔이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호수가 특히 아름다워 보이는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모레인 호수가 가장 빛나는 시간은 오후 세시다.
모레인 호수의 형성은 빙하의 이동과 관련이 있다.
아주 오래전 빙하가 이동하면서 자갈, 돌, 모래, 진흙 등을 운반하고 그 물질들이 특정 장소에 쌓여 퇴적물이 된다. 오랜 시간을 거친 퇴적물들은 큰 언덕이나 벽을 형성하고, 약 10,000년 전 빙하기가 끝나면서 평평한 형태로 남게 되는데, 그곳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된 것이 바로 모레인 호수다.
'모레인'은 빙하가 남긴 자갈과 돌을 의미한다.
이 호수의 고유한 색깔은 빙하가 깎아낸 미세한 돌들이 물속에 섞여 반사되어 만들어진다고 한다. 놀랍도록 투명한 호수는 특유의 터키블루빛을 발하다가,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면 맑은 청록색을 띠기도.
눈앞에서 호수의 색깔이 서서히 변하는 게 느껴져 신기하다.
예전에 이토록 아름다운 호수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1969년부터 1979년까지 약 10년 동안 캐나다 20달러 지폐의 뒷면에는 모레인 호수와 이를 둘러싼 10개 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캐나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누군가는 호수를 두어 개 보고 나면, 자연만 보는 여행을 하면 좀 지루하지 않냐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어디선가 그런 질문을 몇 번 받았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반대의 입장입니다. 두어 개의 호수를 보고 나면 세네 개의 다른 호수를 보고 싶고, 호수마다 풍기는 고유한 분위기는 몇 시간을 바라보고 있어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모레인 호수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에서 그대로 뒤를 돌면, 멀리에 만년설의 바위산과 침엽수가 뻗어있는 너른 숲이 펼쳐져 있다. 청록색 호수에서 눈을 떼기는 어렵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관점을 넓히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초록빛 세상이 펼쳐지는 곳이, 모레인 호수다.
밴프가 보여주는 모든 모습에 끊임없이 감탄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을 보고,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이나 생각의 여유가 존재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라고 생각한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아주 조금씩 보이기도 하는 지금이, 그 정신적인 여유 공간이 가장 큰 시기라고 느껴지기도 한다. 열심히 돌봐주고 성장시켜야겠다고, 아마도 모레인 호수 앞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모레인 호수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조금 서글픈 모국어가 귀에 크게 들려왔습니다.
"자, 여기서 10분 드립니다!!! 빨리빨리 사진 찍고 내려오세요" 어느 단체 패키지여행 가이드분의 목소리.
그렇지만 모레인 호수에서 10분은 조금 너무해요. 아무리 바쁜 패키지여행이라지만, 오늘 가야 할 호수가 두 개나 더 남았다지만, 밴프에서는 하루를 머물고 내일은 비행기로 6시간 거리인 토론토로 날아가야 한다지만! 이런 호수를 어떻게 10분만 보고 내려가나요, 가이드님. 10분만 더 줘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