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테스의 미학 (2)

괴팍한 세상 속에서의 동료

by 혜아

1편에 이어-


조금 더 갈 수 있어요.

강사님에 대한 언급이 나와서 말인데, 종종 그녀의 말 한마디는 흩어져 있던 나의 동기를 응축시키는 역할을 한다. '혜아님은 유연하니까 더 갈 수 있어요' 라던지 '지금 너무 잘하고 있어요'와 같은 말을 듣게 되면, 누군가의 실제 목소리로 그런 힘찬 응원을 받는 일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드문지 깨닫게 된다.


'난 여기까지잖아'하다가도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와 온전한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 그녀에 의해 오늘의 유연성과 근력치를 최대한으로 뽑아내며 버티는 지구력을 기른다. 내가 올바른 근육을 사용했을 때, 마치 자신의 삼두근이 완성된 것처럼 기뻐하는 강사님의 모습을 보면 괴팍한 세상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동료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스스로 정해둔 한계의 벽이 누군가가 나를 밀어주는 느낌으로 인해 금이 가기도 했다. 오늘도 1cm만 더 뻗어보라는 그녀의 응원에 힘입어 숨겨진 근력을 찾아낸다.



필라테스는 수용소의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운동법으로 출발하여 신체의 재활과 자세 교정에 그 목적이 있다. 그만큼 많은 동작들이 몸의 힘을 조절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무조건 힘을 세게 주는 것이 정답이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몸무게를 버티며 미세하게 균형을 잡는 동작이 대부분이다.


삶의 까다로운 문제들은 나의 컨트롤 능력 밖에서 활개를 친다.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들에 스스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 괴로운 건 무력감이나 길을 잃었다는 느낌보다 어쩌면 어떤 것을 노력해야 하는지 조차도 모를 때일 수 있다. 특정 문제에 함몰된 현실이 마음을 짓누르면 생각의 크기는 점점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그것이 마음의 기력을 0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힘을 쥐어짜 내서 할 수 있는 건 0점의 마음으로 뚜벅뚜벅 필라테스에 가는 일이었다. 50분의 운동 끝에 오는 작은 성취감이 어떤 마음도 건져 올릴 수 있다는 건, 내가 알고 있는 확실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방황해도 그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온전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생각과 신체를 단련하고 내면을 교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때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다.


신체의 균형을 잡으며 버텨야 하는 무거움은 온전히 나의 몸무게뿐이다. 내가 나에게 주는 무게를 버티며 다시 힘을 만들어낸다. 그 시간 안에서, 그래도 오늘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자기를 적절하게 통제하고 나면 외부로부터 빼앗겼던 일상의 주인의식을, 보통은 되찾게 마련이다.



필라테스를 하며 가장 자주 듣는 말은 어깨와 골반을 수평으로 유지하기, 몸의 코어를 이루는 몸통을 수평으로 유지하기, 쇄골을 천장으로 뽑아내기 등등이다. 모든 동작이 구겨져 있는 몸을 의도적으로 펴내는 것과 연관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세를 바르게 유지하는 것은 순전히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 사람 자세가 참 바르다' 하고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평소에 자세에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일 터다.


5살 때 발레를 시작해서 10년 정도 배웠었다. 그때도 발레 선생님은 언제나 몸의 중심을 잡는 것이 첫 번째라고 가르쳐 주었었다. 갈비뼈는 닫고 아랫배에 힘을 주며 어깻죽지가 위로 올라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한다. 목은 항상 길게 빼고 시선은 언제나 멀리. 어린 나이였어도 코어의 중심을 잡는 방법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필라테스는 단순히 몸의 라인을 예쁘게 만들기 위한, 특히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다. 우리는 몸의 평형을 유지하며 어딘가에서 구부러졌을 자신감이 함께 펴지는 것을 경험하고 흠이 난 마음의 중심을 유지할 수 있다. 몸을 수평으로 이루려고 하는 노력은 긍정적인 감정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과정과도 같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필라테스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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