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일지에 겁재가 있으면 생기는 일
'아, 배 아파. 너무 부럽다.'
누구한테 터놓고 이야기 한 적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창피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니까. 하지만 내 안에서 꿈틀하는 시기심이라는 존재가 항상 나를 불편하게 했다.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럽고, 돈 잘 버는 사람 보면 부럽고, 뭘 잘한다는 사람 보면 부럽다. 나랑 비교하니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없는 것들을 가졌다. 나보다 잘생겼고 나보다 몸매도 좋고 나보다 부자이고 나보다 잘났고 나보다 성공했다. 그래서 부럽다.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지 겉으로는 티를 내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은 진작에 눈치챘다. 편하게 생각하는 남편 앞에서 나도 모르게 누가 부럽다, 이런 말을 많이 하긴 했다. 음, 알 수 없는 시기심, 질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나의 시기심 역사는 돈이라는 걸 본격적으로 쓸 때부터 도드라졌다.
'이건 진짜 더치페이가 아니야. 결국 내가 손해잖아, 적게 먹고 돈은 더 내고.'
대학교 시절 주말에 친구들과 시내에 있는 롯데리아 식당에 모여 앉아있었다. 그 당시 패스트푸드점은 음식을 먹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편리한 위치에 깔끔하고 이쁜 인테리어로 밝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만남의 장소였다. 맛있는 햄버거, 치킨, 감자튀김 같은 서양 음식을 저렴하고 먹을 수 있어 좋았다. 또 여대생들이 수다도 떨기에 딱 좋아서 인기가 많았다.
그때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더치페이가 유행했다. 자기가 먹은 것은 자기가 내는 걸로. 더치페이 방식은 돈을 계산하고 엔 분의 일로 나눠내는 식이다. 6명이 다 같이 모여서 음식을 먹으면,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한꺼번에 시키고, 그것을 테이블 한가운데에 두고서, 다 같이 나눠서 먹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음식값을 계산할 때는 총금액을 엔 분의 일 나눠서 각자 얼마씩 똑같은 금액을 걷어서 한 명이 대표로 음식값을 지불했다. 한 명이 여러 명의 음식값을 독박으로 내는 것은 아니므로 더치페이는 상당히 합리적인 문화였다. 아무도 불평이 있을 거 같지 않은 아주 타당한 규칙이었다.
불고기 버거 1개, 새우 버거 1개, 데리 버거 1개, 후라이드 치킨 2조각, 감자튀김 2개, 콜라 1개, 사이다 1개 이렇게 시켰다. 다양하게 시켜서 골고루 맛을 보는 게 우리들 먹방 스타일이었다. 주문할 때 햄버거는 반으로 잘라달라고 했다. 주문한 음식이 모두 테이블 한가운데 모였다. 감자튀김 2개는 쟁반 위에 쏟아부어서 하나로 푸짐하게 합쳤다. 콜라를 담은 종이컵에는 빨대 3개를 꽂아서 각자 자기가 먹는 방향에 위치를 고정했다. 친구들은 햄버거를 한입 베어 물고 와구작와구작 씹어 먹는다. 그리고 콜라를 빨대로 쪼옥 한 모금 마신다. 콜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바로 맛소금이 뿌려진 따끈따끈한 감자튀김을 하나 집는다. 빨간 케첩에 퐁당 찍어서 입속으로 쏘옥 집어넣는다. 맛있는 기름기 음식으로 작은 파티가 열렸다.
"있잖아, 글쎄 남자친구가 어제 나한테 이런 말을 했지 뭐야."
"드라마 주인공 남자 같은 사람은 왜 내 주변에 없는 거야?"
"그 여주인공처럼 나도 그런 헤어스타일 해볼까? 어울릴 거 같아?"
"리포트 다음 주까지 제출해야 하는데 어디까지 작업했어?"
다양한 소재가 우리들 이야기 테이블에 올라왔다. 친구들은 맛있는 음식과 함께 까르르까르르 웃으면서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유독 거기서 딴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A 친구는 새우버거 1개를 통으로 먹네, 또 콜라를 혼자서 거의 다 마시고, 게다가 감자튀김을 1개까지, 아주 제대로 포식하고 있어. 이거 돈으로 계산하면 3500원인데...' 난 마침 집에서 점심을 잔뜩 먹은 후에 모임에 참석해서 그런가 식성은 좋지만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A 친구는 점심을 먹지 않고 바로 여기로 온 것이다.
총무 담당인 나는 주문을 하고 우리들이 먹은 음식값을 계산했다. 총 12,000원이 나왔다. 인당 2천 원씩 걷으면 된다. 나는 배불러서 2천 원 치를 다 먹지를 못했는데 다른 친구는 나의 두 배 가까운 3500원 치를 먹었다. 하지만 엔 분의 일 원칙에 따라 2천 원만 내면 끝이라니.
'이건 진정한 더치페이가 아닌데... 차라리 각자 따로따로 시키는 게 맞는 거 아냐?'
친구들 수다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만 A라는 친구가 얼마나 음식을 많이 먹는가 그것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배운 주판 암산 기술이 왜 이런 때 능력을 발휘하는지 야속하다.
'왜 나는 이렇게 쪼잔한가?'
속으로 나도 너무 불편하다. 친구가 배고파서 좀 더 먹을 수도 있는데, 내가 배부르면 덜먹을 수도 있는데.
'왜 나는 이게 너무 눈에 거슬리는 거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혼자서 천원 때문에 손해 받다는 느낌이 드는 게 나도 싫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도 우정을 저버리는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속상하다.
왜 이런 사소한 푼돈 때문에 그러는지. 남도 아니고 친한 친구가 맛나게 먹는 걸로 굳이 비교하고 있다니. 게다가 큰돈도 아니고 이런 소소한 돈에 연연하는지. 나도 내 모습에 짜증이 올라왔다. 그렇다고 A라는 친구에게 네가 많이 먹었으니 돈을 좀 더 내라는 말도 못 했다. 그냥 속으로 끙끙거리기만 할 뿐 어떤 말이나 액션을 하지도 않았다.
이런 일들은 너무 자주 있었다. 친구들과 돈을 걷어서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을 때도 내내 이런 불편한 마음이었다. 회비를 걷어서 1박 2일 놀러 갈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많이 마시고 많이 먹으려고 했다. 먹성도 좋지만 정확하게 내 몫을 챙겨 먹으려고 애썼다. 아니 오히려 더 먹으려고 했었고 분명히 다른 친구들보다 더 먹었을 거다.
왜 이런 사소한 것에 집착했을까? 알고 보면 별거 아닌 푼돈 때문에. 왜 이리 속이 좁은 사람이 되었을까? 겉으로는 아량이 넓은 사람인척 하지만 속으로는 밴댕이 소갈딱지였다. 그 이유를 사주에서 찾아보자면 아마도 일지에 있는 겁재 때문인 거 같다.
겁재라는 단어 뜻은 재물을 겁탈한다는 의미이다. 사주에 겁재가 있다면, 내가 가져야 할 재물을 겁재라는 타인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으로 누군가 내 재물을 가져갔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타인이 가져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아마 확률적으로 뺏겼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포인트는 일지 겁재가 있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인다는 거다.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는 게 핵심이다.
예를 들어 두 명이 한 팀으로 이삿짐을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사 비용으로 5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어느 고객과 계약을 했다. 이사 당일 아침 6시에 고객 아파트에 도착해서 이삿짐을 옮기기로 했다. 한 명은 아침 6시에 출근해서 이삿짐 트럭에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하는데 다른 한 명은 8시에 출근했다. 어젯밤 지인과 술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아침에 알람을 못 들었단다. 죄송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바로 일을 시작했다. 오후 2시쯤이면 일이 끝났어야 하는데 3시가 넘어서야 새로운 아파트로 모든 짐들을 옮길 수 있었다.
정시에 출근한 일꾼이 만약 겁재가 있다면 어떤 마음 상태일까? 상상해 보면 손해 본 느낌을 받지 않을까? 하지만 대놓고 지각한 동료에게 너는 늦게 왔으니 일당 25만 원 전부를 받을 자격이 없어. 그냥 20만 원만 받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비견이라면 가능할 거 같지만.
그러니 속으로 내 재물을 타인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 몫이 뺏긴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좀 더 일을 더했을 뿐인데 내 돈을 손해 봤다고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일지 겁재는 내가 기준이 된다. 만약 내 소유가 0개이고 옆에 10개인 사람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상대방 것을 뺏어서 나도 5개 소유하고 상대방도 5개 소유하는 공정함을 원한다. 나와 상대방이 골고루 가져야 한다는 것에 집착한다. 나를 기준으로 내가 타인과 평등하게 소유했는지 아닌지가 관심사다.
상대방이 노래를 잘하면 나도 노래를 잘해야 하고 상대방이 10억짜리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면 나도 10억짜리 아파트가 있어야 한다. 만약 누군가 타인과 나를 불공평하게 대우를 한다면 무척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편한 사람한테 투덜투덜 불만을 토로할 거다.
일지 겁재에게 불공정, 불공평은 공동체나 사회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나와 관계 맺고 있는 타인, 나와 비교되는 상대방과의 공정성을 따진다. 즉, 굉장히 주관적인 판단으로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볼 수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내 속마음을 한마디로 잘 표현해 주는 속담이다.
'친구는 아파트를 사서 4억을 벌었는데 나는 오히려 1억 손해라니.'
속담에는 사촌이 땅을 샀지만 내 친구는 아파트를 샀다.
그 친구는 직장에서 만나서 친하게 지내게 된 6살 어린 동생이었다. 시드니에 정착해서 외롭고 힘들 때 그녀와 가끔 전화로 수다를 떨면서 위로를 받았다. 지나고 보니 나의 일방적인 하소연과 넋두리였던 거 같다. 여하튼 그녀도 일지 겁재가 있는 사주였다.
내가 그녀의 시기심에 먼저 불을 붙였다. 시드니에 어찌하다 보니 고점에 작은 타운하우스 하나를 구입하게 되었다. 어디 동네에 집을 보러 다녔는지, 집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얼마에 구입했는지 등등 나의 일상을 공유했다. 내가 집을 구입한 지 몇 달이 지나서 자기도 서울에 아파트를 하나 사고 싶단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고 친구의 아파트 구입에 적극 응원해 주었다. 그녀는 원하는 동네를 정했고 부동산에 물건을 찾아다녔고 아파트 임장을 했다. 운 좋게 예산에 맞는 좋은 물건이 나왔다. 50% 은행 대출을 받고 모아둔 돈 합쳐서 4억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친구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었다. 당연히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내 속마음에는 순도 100%짜리 축하는 아니었다. 비록 대출 80%이지만 난 6억짜리 타운하우스를 샀으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약간의 거만함 같은 게 있었다. 너와 비교해서 내가 더 비싼 집을 소유했다는. 그런데 그 거만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점에 산 타운하우스는 5억으로 떨어져 버렸다. 대신 그녀의 서울 아파트는 미친 듯이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덕분에 아파트를 잘 샀다면서 언제 한국 나오면 밥 한 번 사겠단다. 자기 아파트 시세는 지금 8억이라고. 두 배를 벌었다고. 투자한 금액에 비하면 4배를 벌었다고. 내가 아파트를 사라고 적극 추천해 줘서 그렇다고 고맙단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 저 건너편에서 입꼬리가 귀에 걸린, 활짝 웃고 있는 표정이 훤하게 보인다.
친구는 일지 겁재 시기심이 발동했고 나를 따라서 아파트를 구입했고 투자에 성공했다. 그런데 나는 배가 아프다. 같은 일지 겁재 시기심을 가지고 누구는 투자 성공으로 가는데 나는 실패라니. 사주에 있는 다른 글자들이 영향을 끼쳐서 그런가. 여하튼 시기하는 마음을 현실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남들을 부러워하기만 했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노력을 하지는 못했다.
근데 신기한 게 내가 시드니에서 집을 구입한 이후로, 내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주변 지인들이 다들 집을 하나씩 구입했다. 이게 참 신기하게도 다들 집값이 올랐다는 거다. 하우스를 구입해서 그런지 몰라서 상당히 많이 올랐다. 주변 사람들에게 집을 사도록 독려한 사람은 나였는데 정작 나는 결실에서 소외되었다.
나의 시기심은 집요했다. 지인들 집값이 얼마인지, 내 집값은 얼마인지, 정기적으로 인터넷에 검색하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모니터 앞에서 혼자 몰래 남과 비교질을 하고 있다. 결국 시샘하고 속이 쓰리다. 이런 상대적인 결핍감에 빠지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은 헛짓거리이고 시간 낭비라는 걸 이성적으로는 아는데...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또 검색을 하고 있다. 내가 나를 괴롭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친구와 지인들과는 관계가 끊어졌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없는 나의 그 잘난 시기심 때문에.
음, 그런데 역으로 생각해 보니, 시기심이 나쁜 것만은 아닌듯하다. 왜냐 내 주변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니까. 와우 정신승리 오지다. 오져.
다음 편 예고
사주에 같은 겁재가 있어도
위치에 따라 너무 다른 성격 이야기.
타인과 나를 비교하는 시기심을 가진 수니와 달리
남편은 타인들 간의 평등을 원하는데.
다음 연재 글에서 만나요.
독자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특히 편집자 여러분 눈길 좀 주세요.
편집자님이 최고라고 말해줄 때까지 고고씽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