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나 <하우스 오브 구찌>처럼 대놓고 명품브랜드가 제목에 들어가는 영화도 있긴 하죠.
런던에서 전장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청소부로 살아가는 중년여성 주인공은 청소해 주던 집에서 디올 드레스를 보고는 마음을 빼앗기죠. 남편은 결국 전사소식을 전하고, 복권당첨과 남편의 참전으로 생긴 돈을 자신을 위해 쓰기로 결심합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만, 그다음부터가 좀 어이가 없었는데요. 갖고 싶던 디올 옷을 사기위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는 겁니다. 그리고는 파리 디올 매장에서 무시도 당하고 도움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돌아옵니다. 갖은 고생 끝에 사온 드레스는 오지랖 넓게 남에게 입혔다가 태워버리고, 뜻밖에 디올 본사의 배려로 원하던 옷을 선물로 받게 되고요. 행복은 가까이에서 찾는 거라며 늘 곁에 있었던 남자와 춤을 추며 소소한 행복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원작이 오래된 거라니 조금은 이해가 되긴 했지만 해리스부인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나 다른 출연배우들의 연기가 아니었으면 보다가 포기했을 거에요. 명품브랜드에 관심이 덜한 탓도 있겠지만 너무 허무한 거에요. 명품 드레스가 인생의 소망이라니….
떠오르는 노래 한곡이 있었습니다. 정태춘 작사 작곡, 그 보다 훨씬 노래를 잘하는 부인 박은옥 노래 <양단 몇 마름>입니다. 아, 양병집씨도 불렀네요. 트로트 풍 노래에요.
그 옛날 시어머니는 늘 한복을 입고 계셨어요. 비단 수 곱게 놓인 양단에 고운 공단 치마저고리, 맵시 나게 입으셨죠. 두루마기에 여우털 목도리, 보석 몇 개 걸치시고 부잣집 마나님 자태를 뽐내며 사셨습니다. 세상 떠나시기 전 제게도 많은 걸 주셨어요. 그게 며느리품에서 옷장 깊숙이 있는 거 보면 안타까우실 겁니다. 고백하자면, 시어머니가 아니라 며느리인 제가 노래처럼 산 것 같아요.
노래는 이렇습니다.
어떤 새색시가 시집 올 때 친정에서 양단 몇 마름, 꽃신 한 켤레 갖고 와서 고리짝에 넣어 둔 채 가끔 그저 만져만 보고 둘러만 보다가 세월이 간 겁니다. 늙어 버리면 입지도 신지도 못하고 두고 갈 건데 그걸 생각 못하고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 보면 닳을까 애지중지 아까워서도 그랬겠지만, 살아가는 노동의 고달픔에 곱게 꾸미고 입고 신고 다닐 처지가 아니었던 게 맞지 싶습니다. 지난 시절, 대부분 그랬던 것 아닙니까.
비단실로 수놓은 양단은 자칫 옷감 버릴까 조심조심 입어야 하죠. 꽃신도 막 신는 고무신 아닌 다음에야 젊은 날 호시절에 잠깐 잠깐 나들이때나 신어야 하는 거였으니까요.
어찌 보면 ‘양단 몇마름’은 청춘의 그림자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허망한 세월의 흐름바깥에 고이고이 모셔둔 내 청춘의 소망과 광채 같은 거요. 빛을 제대로 낼 수 있을 때 맘껏 보여주고 박수도 받고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 채 황혼에 서 있나 싶고. 물론 순간의 광채에만 의지했다면 또 잃는 것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난날 우리 땅 여인네들의 삶은 너무나도 빛을 숨기고 청춘을 인내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노래 속 마음으로 남았습니다.
트롯풍, 엔카 느낌도 살짝 나는 이 노래<양단 몇마름>을 들을 때면 비단으로 감고 사시긴 했지만 당신 원하는 삶은 아니어서 속으로 허망해 하셨던 시어머님의 삶이나, 저처럼 물려 받은 것도 즐길 줄 몰랐던 중늙은이의 꿈이나, 영화 속 미시즈 해리스의 생을 바친 디올 드레스 한 벌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켜보는 남자들의 삶도 비슷할 거라고요? 그래서 인생이 다들 허망하다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너나없이 다들 그러니 위안이 되려나요.
아,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란 영화, 은근히 좋다는 분들 많다고 합니다. 다들 착한 사람들만 나와서인가봐요. 요즘 독한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 영화 보다가 문득, 떠오른 노래, 박은옥의 <양단 몇마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