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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yell Dec 01. 2022

첫눈을 기억하는 법 | 블랙포레스트 케이크

소설 - 작은 눈과 작은 봄

"생일인 거 알고 주는 선물인가 보다."


이맘때 내리는 겨울 첫눈을 보며 하는 말이다. 고향인 경남에서는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기가 쉽지 않다. 눈이 1cm만 쌓여도 휴교령이 내려질 정도였다.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란 우리에겐 어쩌면 눈은 선물과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신기하게도 서울에서는 동생 생일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그 해의 겨울 첫눈이 내린다. 생일을 하늘이 함께 축하해주는 셈이다.


소설과 생일이 가까운 동생은, 태어나던 날에도 눈이 한창 내렸다. 이모는 부산에 큰 눈이 오던 날, 뉴스에 나온 적이 있었다. 막 태어난 조카를 눈을 뚫고 보러 간다는 인터뷰 덕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아직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때문인지 동생 생일이 가까워지면 첫눈을 기대하게 된다.


그렇다고 생일선물로 첫눈만 받고 끝내버릴 수는 없는 법. 아무리 눈을 좋아하는 경상도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매년 언니의 생일 선물과 함께 직접 구운 케이크도 준비한다. 올해는 동생이 콕 집어 블랙포레스트 케이크를 주문했다. 체리와 초콜릿이 올라가는 케이크인데, 문제가 조금 있었다. 생체리를 파는 곳이 없었다!


한국시장의 체리는 주로 수입산이다. 여름 과일이기 때문에 여름에는 북반구에서, 겨울에는 남반구에서 체리가 들어온다. 남반구에서 수확한 칠레산 체리는 11월 중순부터 시장에 나오기 시작하는데, 이게 동생 생일과 거의 겹쳐있는 시기였다.


천만다행으로 생일 일주일 전, (시즌 초입이라 상당히 비싼) 체리를 구할 수 있었다. 돈과 시간, 노력까지 가득 담아 올해도 세상에 하나뿐인 케이크를 만들었다. 동생은 사 먹는 걸 더 좋아할지 모르지만, 어쩔 수 없지. 홈베이커의 동생으로 태어난 걸 어떡해. 나도 고생 좀 했다고.




블랙포레스트 케이크는 초코 블라썸이 가득 올라간 외관이 숲을 떠오르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코 블라썸까지도 직접 만들다 보면,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이내 깨닫게 된다. 손으로 긁어낸 얇은 초코 블라썸은 큰 나무의 낙엽과 모습 닮았다. 이걸 케이크 위에 잔뜩 올려주면 낙엽이 겹겹이 쌓인, 해가 들지 않아 어두운 깊은 숲 속의 모습을 한다. 검붉은 체리까지 올려주면 맛과 색의 조화가 절정에 달하면서 완벽한 검은 숲, 블랙포레스트가 완성된다.



11월의 체리는 아직 작고 비싸다. 그래도 맛과 색은 충분히 들어 새콤달콤한 맛을 낸다. 체리는 맛을 볼 때면 의외의 부분에서 놀라게 되는데, 향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감기약이나 사탕에 쓰이는 익숙한 체리향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옅고 새콤한 향만이 코끝에 스친다. 인공의 체리향은 떠올릴 수도 없는 신선한 체리는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잔뜩 준비해서 반으로 갈라 씨를 빼두자.

초코 블라썸은 판 초콜릿을 초콜릿 긁개로 긁어내 만들 수 있다. 케이크 하나를 만드는데 의외로 많은 초콜릿이 쓰이기 때문에 너무 달지 않은 초콜릿을 쓰는 게 중요하다. 손의 온도에도 녹아 나오는 초콜릿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하지만, 좋은 초콜릿이라 그렇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손을 쉬지 않는다. 직접 긁어내야지만 낙엽의 느낌이 충분히 나기에,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게 된다. 비록 다음 날 팔이 잘 움직여지지 않더라도 말이다.

초코 블라썸은 녹지 않게 냉장고에 넣어두고, 초코 시트를 구워보자. 계란과 설탕으로 부피를 키워주고, 코코아 파우더로 초콜릿의 맛과 향을 더한다. 버터로 시트를 한결 촉촉하게 만들고 나면, 구울 준비는 끝난다. 진한 색으로 구워진 케이크 시트는 크림이 녹지 않게 충분히 식혀준다.

기본 스펀지케이크에 코코아 파우더를 추가했을 뿐이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초콜릿의 맛이 난다. 초콜릿이 들어가지 않지만, 누가 먹어도 초코의 맛이 가득한 케이크 시트가 완성되는 것이다.


보통의 블랙포레스트 케이크는 생크림으로 속을 채우지만, 동생을 위한 케이크에는 비장의 재료가 추가된다. 체리와 좋은 궁합을 자랑하는 피스타치오가 주인공이다. 피스타치오는 겉을 살짝 구우면 고소함 사이로 달콤한 향이 올라온다. 잘 구워 오일과 함께 갈아내면 진한 고소함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다. 간단하게 완성된 피스타치오 페이스트는 버터크림과 생크림으로 만들어 초코 시트 사이에 가득 채운다.

버터크림은 버터를 베이스로 커스터드 크림을 더해 만든다. 계란과 우유, 설탕을 끓이면서 완성되는 농축된 맛의 달콤한 크림은 피스타치오, 버터와 만나 각각의 풍미를 한껏 끌어올린다. 달콤하고 고소하면서 향기로운 크림은 남기기 아까울 정도이다.

버터크림이 농후함을 담당한다면 생크림은 가볍고 촉촉하게 더해질 예정이다. 체리를 사이에 두고 버터크림과 생크림이 다툴지도 모른다. 누가 더 잘났냐 물어도 누구 하나 쉽사리 대답하기 쉽지 않다.


생크림의 가벼움을 버터크림이 눌러 앉히고, 버터크림의 눅진함을 생크림이 끌어올린다. 그 절묘함 사이에서 체리의 상큼함과 피스타치오의 고소함이 빛을 발한다.

시럽으로 촉촉하게 풀어진 초코 시트를 마저 올리고 생크림으로 아이싱 한다. 여기까지도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아직 피날레가 남아있다. 장식을 할 차례이다.


초코 블라썸으로 케이크를 뒤덮고 그 위로 화이트 초콜릿으로 만든 블라썸도 얹어준다. 체리는 올리고 싶은 만큼 올리고, 피스타치오도 잘게 부숴 올려준다.

가을이 지나면서 숲은 낙엽으로 뒤덮였고, 그 위로 올 겨울 첫눈이 내린다. 어느새 검은 숲에서 하얀 숲으로 탈바꿈한다. 어느 운동장에서 눈을 굴리던 꼬마가 이 숲에도 찾아왔었는지, 숲 가운데 눈사람이 서 있다. 덤불도, 산속 체리도 쌓인 눈 때문에 하얗게 옷 갈아입는다. 그렇게 블랙포레스트로 시작한 케이크는 화이트 포레스트가 되어 생일의 주인공을 맞이한다.

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늦은 탓에 동생은 첫눈 선물을 받지 못했다. 그런 동생에게, 첫눈이 소복이 쌓인 생일 케이크를 선물했다. 빨간 체리 모자를 쓴 채 아이를 기다리던 눈사람은 어 게임 속 눈사람처럼 선물을 줄지도 모를 노릇이다. 엉성하게 완성된 모양새일지 몰라도, 그 마음만은 엉성하지 않았다고 전하며 올해 생일을 축하한다.


아직 받지 못한 올해의 겨울 첫눈 선물과 함께, 눈 쌓인 블랙포레스트 생일 케이크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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