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층 집 대문 앞의 작은 나무가 그랬다. 큰 나뭇잎 하나와 작은 잎 하나가 붙은 것 같은 특이한 잎의 생김새에, 옆으로 난 가시는 4살 난 아이의 손가락만큼 길었다. 뻣뻣한나뭇잎 하며열매 없이 가득한 가시까지, 예쁜 구석이라곤 없는 이 나무가 어린 마음엔 무서워질 정도였다. 그래도, 엄마가 일러 준 덕이겠지만,열매 없이도 그것이 유자나무란 건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야외에서 월동이 되었으니 주부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싶다. 유자나무는 겨울이 되어도 가시 끝까지 진한 녹색이었다. 그런 모습이 작은 인간의 마음에 들진 못했을지언정, 도심 속 동물들은 그 초록색이 내심 반가운 모양이었다.
봄이 되면 나뭇잎 사이로 같은 색의 큰 애벌레가 보이곤 했다. 어른 엄지만큼 크고 통통한 애벌레는 얼핏 누에의 모습과도 닮았다. 벌레의 집이 되어버린 나무의 모습에 작은 인간은 한번 더 놀랐지만, 애써 찾아온 손님을 내치진 않았다. 그 덕인지, 그 녀석은 호랑나비가 되어 떠날 수 있었다.그렇게 이층 집의 유자나무에는 유자 대신 나비가 열렸다.
유자는 나무도 특이하지만, 향과 맛도 굉장히 특징적이다. 그 특유의 향과 신맛 때문에 생으로 먹긴 힘들다. 때문에 보통 청으로 만들어 먹는데, 수많은 씨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도 유자청 없는 겨울은 어딘가 비어버린 느낌이라 올해도 귀찮음을 무릅쓴다.
올해는 유자청을 차로만 즐기기보단, 차에 곁들이는 디저트로 즐겨볼까 한다. 유자청으로 만든 시럽은 롤케이크를 촉촉하게 해 줄 뿐 아니라 향도 한가득 채워줄 것이다. 그 사이로 초록 잎사귀와 초록 애벌레도 엿볼 수 있다. 앗, 아니 어느샌가 나비로 변해버린 모양이다.
롤케이크는 스펀지케이크보다 훨씬 가벼운 반죽으로 만든 제누아즈를 사용한다. 계란이 잔뜩 들어간 반죽은 구워냈을 때 한결 촉촉하고 부드럽다. 그 사이로 고소한 생크림을 가득 담아 촉촉하다 못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는 디저트를 만들어보자. 나뭇잎모양의 녹차맛 가나슈는 보는 맛만큼이나 먹는 맛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
촉촉한 케이크 시트를 위해 계란을 덥히고 부피를 키워준다. 유자청을 넣어 데우면 옅은 유자의 향이 난다. 거품을 내다보면 그 향은 더욱 진해져 온 주방에 퍼진다.
결이 생기기 시작한 계란에 가루를 넣고 얼른 섞어낸다. 가루를 만난 거품은 이내 꺼지기 시작한다. 애써 키운 부피를 지켜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스피드이다.
미리 준비해 둔 틀에 반죽을 펼치고, 오븐에 빠르게 구워낸다. 가벼운 만큼 굽는데 필요한 시간도 많지 않다. 달콤한 향을 내며 익은 반죽은 틀에서 꺼내 잘 식혀 준다.
반죽이 완성되는 동안 나뭇잎이 되어줄 녹차 가나슈를 만들자. 우유에 재료를 넣고 끓이다 틀에 부어 차갑게 굳혀준다. 진한 우유의 맛이 나는 녹차 가나슈는 부드럽지만 모양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탱글한 식감이 중요하다. 녹차가루는 아끼지 않는 편이 맛과 색을 내는 데에 도움이 된다.
제누아즈를 식히고, 가나슈를 굳히는 동안 다른 재료도 준비해 보자. 유자청을 물과 섞어 끓여내면 간단하게 유자 시럽이 완성된다. 제누아즈를 더욱 촉촉하게 만들고 향도 진하게 만들어 줄 중요한 재료이다. 생크림은 설탕 없이 단단하게 휘핑한다. 우유의 향을 살려주면서 케이크는 촉촉함의 끝을 달릴 수 있게 한다.
굳은 가나슈를 나뭇잎 모양으로 잘라내 길게 이어 내면 준비는 끝난다. 이제 제누아즈 위에 준비한 재료를 차례로 올리면 된다. 유자 시럽을 바르고, 생크림을 두껍게 깔아 가나슈를 중앙에 올린다. 제누아즈의 밝은 부분이 밖으로 오게 말아내면, 롤케이크의 모양새를 갖춰간다.
하지만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다른 데에 있다.
녹차 초콜릿으로 나비 날개를 하나하나 그려내면 처음에는 이게 뭘까 하는 물음표가 생긴다. 하지만 이내 두 날개를 이어 줄 때면 의심의 여지없이 나비 한 마리가 피어난다. 초록의 애벌레인줄 알았던 녀석은 어느샌가 초록의 나비로 탈바꿈해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말아낸 모양대로 굳은 롤케이크는 그 위로 장식을 해주어도 좋고, 단면이 보이게 썰어내 장식해주어도 좋다. 칼을 대면 부드럽게 잘려버리는 롤케이크는, 유자향을 내면서 가운데에 초록 잎사귀를 품고 있다. 공들여 만든 나비 장식은 그 향에 이끌린 듯 나뭇잎 위로 날아와 앉는다.
비록 열매는 열리지 않았더라도 한겨울 도시의 초록색을 책임졌던 유자나무는 길 잃은 애벌레의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유자 대신 나비가 열렸던 작은 유자나무와 초록의 애벌레를 기억하며, 유자 롤케이크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