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면 한 번은 나오는 이 말. 종업식 선물로 만들어줬던 이니셜 쿠키를 떠올리는 말이다. 겨우 한 번에 그친 그 기억을 아직 마음에 품고 사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게 골판지로 직접 박스를 만들고 이니셜과 이름이 새겨진 쟁반만한 쿠키를 담아줬더랬다. 초코와 버터맛 쿠키로 만들어졌던 그 졸업 선물은 일주일 밤을 새우며 만든 나의 '걸작'이었다.
베이커의 숙명일까? 그 해뿐만 아니라, 매년 연말에 모임을 갈 때면 뭐라도 만들어서 가게 된다. 언제의 크리스마스에는 말차와 얼그레이 밀크잼을, 또 언제의 연말에는 흑임자와 피스타치오 버터링을 잔뜩 굽기도 했다. 다행히도 착한 친구들은 매번 맛있게 먹어줬다.
그리고 맛있고 예쁜 선물의 이면에는 어딘가 잘못된 못난이 쿠키도 있기 마련이다. 우습게도 이런 B품은 포장되지 못한 채 가족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위해 무언갈 만들면서도 가족에게는 제대로 된 베이킹 선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언제나 그렇듯)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느라 수고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쿠키 선물을 해 본다.
동지가 되면 밤이 가장 길어지면서 잡귀가 모인다고 믿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붉은색 팥을 쑤어 먹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앙금으로 만들어 쿠키 사이에 집어넣었다. 유난히 바쁘고 굵직한 일이 많은 한해였던 만큼, 내년은 만사형통하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담았다.
앙버터의 유행으로 팥앙금과 버터의 조합은 이미 검증된 셈이다. 달콤하고 고소한 팥소 사이로 향긋하고 어쩌면 약간은 짭짤한 버터가 녹아든다. 거기에 버터를 잔뜩 넣어 파삭하게 부서지는 쿠키가 중심을 잡는다. 선물로 준비하는 만큼 팥을 한 알 한 알 골라내고, 가장 잘 어울리는 버터를 찾는 과정 전반에 작은 마음을 담는다.
우선 팥은 깨진 부분 없이 윤기가 나는 낱알로만 골라낸다. 가볍게 씻고, 주걱에 으스러질 정도로 부드럽게 익힌다. 뜸을 들이듯 천천히, 그리고 오래 익혀내야지만 팥이 부드러워진다.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젓다보면 팥이 무겁게 끓어오른다. 이때의 온도는 용광로의 온도를 떠올리게 될 정도로 뜨겁다. 사방으로 튀는 팥으로 주방과 옷은 엉망이 된다. 하지만 굳건히 버텨내다가 적당한 농도가 되었을 때, 화룡점정으로 소금 간을 더한다. 잘 익은 팥은 자연스레 으깨어지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붉은색이 곱게 든다. 달콤한 앙금을 잘 식혀주는 동안 주방을 정리해 보자.
그동안 쿠키 반죽도 함께 준비한다. 버터와 설탕, 계란을 잘 풀어주자. 거기에 날가루를 넣어 잘 섞어주면 계피향의 쿠키반죽이 어렵지 않게 완성된다.
틀에 유산지를 깔고 질서 정연하게 반죽을 짜낸다. 네모 반듯하게 자리 잡은 반죽은 뜨개질로 떠낸 듯한 모양이다. 이마저도 연말의 따뜻함을 닮았다. 가지런하게 모양을 낸 반죽은 오븐에 넣어 색이 날 때까지 구워낸다.
오븐에서 갓 꺼낸 쿠키는 연약하다. 잠시 틀에서 식혔다가 단단해지면 틀에서 꺼내 마저 식혀준다. 똑같은 모양으로 짜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쿠키의 제 짝은 따로 있다. 비슷한 크기와 모양의 쿠키끼리 짝을 맞춰준다.
쿠키를 구워내는 동안, 버터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 준비한다. 자르지 않고 적당히 펴 발라도 좋다. 쿠키와 비슷한 크기로 잘라낸 버터는 다시 단단하게 굳히고, 팥은 짤주머니에 담아 준비한다.
마지막으로 구워낸 쿠키까지도 식으면, 이제 쿠키를 완성할 시간이다. 한쪽은 달콤한 팥앙금을, 다른 쪽은 향긋한 버터를 올려 하나로 합쳐준다. 부드럽고 바삭하게 부서지는 쿠키는 옅은 계피의 향을 품고 있다.
선물용으로 준비한 틴케이스에 유산지를 길게 깔고, 쿠키를 줄지어 담는다. 드디어 포장된 선물을 받아 든 가족은 신나는 마음으로 뚜껑을 연다. 가장 먼저 케이스를 가득 채웠던 계피의 향이 터져 나온다. 비좁게 담겨 있는 쿠키를 조심히 꺼내 들면 이제 먹어볼 차례이다. '파삭'하며 부서지는 쿠키 사이에 차가운 버터와 팥앙금은 당연하다는 듯 조화를 이룬다.
2023년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당신께 드리는 선물, 팥앙금 버터쿠키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