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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 Nov 23. 2020

숫자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이

회사에서 정신없이 키보드를 두들기다 잠깐 여유가 생기면, 대체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뭘까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날마다 누구 또는 무엇을 위해서 어떤 목적과 목표로 이곳에 나와 일을 하는가. 그 일이라는 건 대체 어떤 실체를 갖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들은 다 어디로 가며,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가. 내가 생산하는 이 파일은 또 어디에 쓰이게 되는 걸까.


회사의 존재 이유라는 건 성장에 있다. 성장하지 않는 회사는 도태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도태되는 회사는 언젠가 망한다 (물론 성장하는 회사도 언젠가 도태되니까 모든 회사는 언젠가 망하겠지..절대 우리 회사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 그 성장이라는 건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숫자로 나온다.

회사의 성장에는 사람의 성장에서와 같은 정성적 평가는 포함되지 않는다. 회사의 성장을 보여주는 지표는 숫자, 오직 숫자가 유일하다. 지난해보다 매출 규모가 더 커졌을 때, 목표보다 더 많은 손익을 남겼을 때, 경쟁사보다 더 높은 시장점유율을 확보했을 때, 인지도나 고객만족도 따위의 지표가 올라갔을 때, 우리는 회사가 성장했다고 말한다.


숫자는 그럼 또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슬프게도, 대체로 사람을 넣어서 나온다.

“사람을 넣는다”는 건 누군가가 열심히 일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큰 기업이 그런 인과에 의해 성장하지는 않는다.

대신 사람은 숫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건 회사에 와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한 개념이다. 그리고 이 회사를 진짜 돌아가게 하는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숫자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숫자는 실체가 없는 것이니까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기획했는데 판매 가능한 목표를 세웠더니 검토 결과 적정한 수준의 손익이 나오지 않는다면?

간단하다. 판매 가능한 목표를 늘리면 된다. 더 많이 팔겠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때 목표를 늘리는 근거는 다양한데, 코로나 이후 성장할 수요가 될 수도 있고, 애초에 너무 낮았던 목표의 재검증이 될 수도 있고, 성장 국가로 눈을 돌려 넓힌 판매 범위가 될 수도 있고, 이도저도 아니라면 그냥 담당자의 호연지기일 수도 있다. 그건 그러니까, 충격적으로 애매하고 비논리적이어도 된다는 뜻이다.

 * 호연지기: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원기, 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

   (“목표에 호연지기가 없다”는 질타는 회사에 실제했던 사례를 가져온 것이다)


어쨌든 못하는 건 아니니까, 담당자는 꾸역꾸역 숫자를 뱉어낸다.

문제는 그 다음. 내가 만든 숫자에 내가 (또는 내 다음 담당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있다.

당장 제품(서비스)이 출시되고 한 달만 지나도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목표 판매량 12만대에 의하면 한 달이 지난 지금 최소 만대는 팔았어야 하는데, 삼천대를 팔았다, 사유와 대책은?


그리고 여기에 어떤 사유와 대책을 쓴다고 해도, 그걸 진심으로 검증할 이는 아무도 없으며, 단지 담당자의 (억지로 부여받은) 호연지기가 실현되지 않았을 뿐임을 모두가 마음 속으로 알고 있다. 결국 그 사유와 대책은 무엇도 아닌 디지털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담당자는 아마 그 다음주에도, 그 다음달에도,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디지털 쓰레기를 생산할 것이다. 그 제품(서비스)이 팔리고 팔리고 팔려서 너덜너덜해지고 그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너덜너덜해지고 그 제품을 기획했던 사람이나 기획을 지시했던 사람들이 더이상 같은 부서에 남아있지 않아서 아무도 그 제품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날이 올 때까지. 그렇게 창조적으로 업무를 생산하는 자가발전의 톱니바퀴는 돌리는 사람 없이도 착착 맞아 돌아간다.


또는 실제로 그 제품이 목표치(12만대)만큼 팔리게 할 수도 있다.

아까도 말했듯이,

숫자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 제품이 정말로 중요한 (직급 높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라면, 영업팀에서 숫자를 밀어넣으면 된다. 여기서도 숫자를 밀어넣는다는 개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데, 그건 말그대로 더 올라갈 수 없는 숫자를 꾹꾹 밀어 올리는 행위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이번달에 만대를 팔아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이다. 그렇게 목표를 짜고 그렇게 가이드를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결과값이 올라간다.

다른 제품 대신에 팔았든, 싸게 팔았든, 끼워주기로 팔았든, 재고를 쌓아두었든, 어찌됐든 이번 달의 숫자는 성장하는 거다.


이런 일을 열두달 내내 반복하다 보면 점점 의문이 많아지거나, 의문을 접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느 쪽이든 사람을 넣어 나온 숫자는 사람을 지치게 하는 법이다.


가끔 회계장부에, 재무재표에 찍히는 저 숫자들이 정말로 실체가 있는 걸까 생각하곤 한다. 저 숫자는 누가 만들어낸 걸까. 저 숫자가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디지털 쓰레기가 나왔을까. 이 자가발전의 끝없는 원동력은 언제 지치는 걸까. 첫번째 톱니바퀴는 어디에서 돌아가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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