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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운 Oct 15. 2018

'제가 진상인가요?'를 말하는 고객

고객센터에서 일하면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 신입 때는 진상 고객과 통화를 끝마치고도 진정이 안 돼 손이 덜덜 떨린 적도 있고, 퇴근해서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도 고객의 못된 말이 생각나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 다니다 보면 진상에 대한 역치가 높아져 웬만한 험한 말에는 눈도 깜짝이지 않게 된다. 크게 심호흡 한 번 하거나, 욕 한 번 하고 다음 전화를 받으면 그만이다. 그래도 가끔은 감정의 한계치를 불쑥 넘어와 상처를 주는 고객을 만날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배송받은 공연 티켓을 분실한 고객이었다. 티켓은 분실하거나 훼손하면 공연 관람, 재발권, 취소 및 환불이 모두 불가하다. 쉽게 비유해 현금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보통 티켓을 분실해서 인입되는 고객들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관람을 시켜달라고 사정을 하거나, 종이 쪼가리 하나 잃어버린 것인데 왜 관람이 안 되느냐고 화를 내거나, 순순히 받아들이는 유형이다. 충분히 예매 페이지 및 유의사항에 고지되고 있고, 요새는 고객들도 티켓 분실 시 관람 불가하다는 점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아 차분히 안내하다 보면 알겠다고 끊는 고객이 대부분이다.


콜센터 입사 전에는 콜센터=악성고객을 케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매너 있는 고객이나 간단한 문의를 하는 고객이 대부분이다.


오늘의 고객에게도 안타깝지만 도와 드리기 어렵다는 안내를 드리고 있는데 지금까지 겪어온 고객들과는 좀 달랐다. 티켓 분실은 본인의 잘못임을 알고 있고, 이미 충분히 고지되어있기 때문에 구제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인지하고 있는 고객이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상담원을 괴롭혀서 본인이 원하는 답을 받으려고 예매 페이지의 안내 글귀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는다.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며 30분 동안이나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티켓은 왜 잃어버리셨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꿈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처음에는 티켓을 어머니가 실수로 버렸다고 말해놓고도 나중에는 본인이 티켓을 배송받았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고 생떼를 쓴다. '제가 진상인가요? 억지 부리는 거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자주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나는 안다. '제가 진상인가요?'를 묻는 고객은 높은 확률로 그렇다는 것을.


30분 넘는 긴 통화 끝에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상담원이 말실수하기만을 기다리는 고객이라 실언을 하지 않으려고 통화 내내 긴장상태였던 탓에 전화를 끊으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이해의 한계를 넘어선 고객을 만나면 도대체 실생활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가 궁금해지는데 이 고객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도 않았다. 질리고 지긋지긋했다. 10만 원이 넘는 티켓 2장을 버리게 생겼으니 화가 나고 답답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고객센터의 뻔한 답변과 납득할 수 없는 규정에 화를 내고 거친 말이 나오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오늘의 고객은 도가 많이 지나쳤다. 수화기 너머의 상담원도 인격이 있는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콜센터를 총알받이로 생각하는 고객사, 상담원의 감정은 어떻게 되든 일이 커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콜센터의 관리자 그 사이에서 상담원들은 점점 외로워진다.


밝은 목소리로 '안녕하십니까, 고객님'이라는 인사말로 전화를 받는 순간에도 혹시 상대방이 어마어마한 악성 고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전화받기가 두려워질 때가 있다. 일부 진상 고객의 폭언과 신경질 앞에 무방비상태로 놓인듯해 참으로 외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입사 1~2년 차에는 진상 고객을 만나면 퇴근하고 동료들과 술 한잔 하면서 푼 적도 많았는데, 요새는 친한 동료도 별로 없고 술 마실 기운도 없다. 마음에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워 얼른 집에 가서 쉬고만 싶어 진다. 온갖 고객들을 만나며 멘탈이 강해진 게 아니라, 어쩌면 상처 입은 마음을 바라보는 게 힘들어 나도 모르게 회피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X 또한 지나가리라는 주문을 외우지만 다친 마음을 추스르는 일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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