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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Feb 11. 2020

네게 흘러간 나의 피

당신은 힘들 때 어떻게 위로받고 용기 내는가. 사람마다 자신만의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시 읽기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시에는 지친 마음을 토닥이는 뭔가가 있다. 분명 좋은 시에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주고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2018년 봄, 내 마음과 내 머리가 점점 굳어가고 말라가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한 달에 한 편씩 시를 외우기로 했다. 처음부터 긴 시를 도전할 자신이 없어서 아주 짧은 시로 시작했다. 반복해서 읊다 보니 조금씩 머리에 남긴 했다. 그런데 한 편을 끝냈다고 생각하고 다른 시를 외우기 시작하니 앞서 외운 시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만 게을러지면 까먹어서 “뭐였더라?” 떠오르지 않았다.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반복하다 그래도 시 하나는 남게 됐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다.     


이 시를 읽으면 세상일이 순조롭게 되는 경우는 없고 힘든 과정을 거치지만 조금씩 나아가다보면 종국에는 결실을 맺게 되리라는 것을 시인께서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읽는 이에게 다 그런 것이니 좌절하지 말고 힘내라고 하는 것처럼. 그래서 난 이 시가 좋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일하는 적십자와 관련해서도 도종환 시인이 쓴 시가 한 편 있다. 헌혈에 관한 시인 ‘네게 흘러간 나의 피’다.


2009년 나는 충북지사에서 회비홍보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때는 회사에서 문화 활동이 많았다. 새로 부임하신 K지사회장님은 언론인 출신에다 지역 문화예술포럼 대표도 맡으실 정도로 문화에 조예가 깊고 문화계와도 관계가 넓으셨다. 이때 도종환 시인께서 지사 홍보대사가 되셨고, 회사에서 열린 문화프로그램에서 시낭송을 해 주시기도 하셨다. 


2009년 5월초 나는 특별한 기억을 하나 가지고 있다. 혈액관리본부 담당자로부터 한 통의 연락을 받았다. 6월 14일 세계헌혈자의 날을 맞이해 도종환 시인께 헌혈에 관한 시를 받아 기념식에서 헌혈자를 위한 헌시로 낭독하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지사 담당자로서 시인님께 연락드렸고, 한 달이 지난 6월 초에 메일로 한 편의 시를 받아 본부에 전달했다. 나는 적십자 구성원 중에 이 시를 가장 먼저 읽어보는 영광을 누렸다.          


네게 흘러간 나의 피     

                                       도종환     


내게서 흘러 나간 피가

목숨의 빈 자리를 천천히 채우며

그의 핏줄 안에 차곡차곡 쌓일 때

내 피의 빈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내 안의 격정적인 피톨들이

꺼져가던 그의 심장의 박동을 일깨우고

기관차의 숨소리처럼 혈관을 밀어 올리고 있을 때

내 피의 빈 공간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네게 흘러 들어간

나의 피를 생각하는 저녁

          

내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도

오히려 기쁜 것을 사랑이라 한다면

피를 나누는 것보다 큰 사랑이 어디 있으랴

       

견딜 수 없는 것을 함께 견디고

가장 어려운 길을 함께 손잡고 가는 걸

사랑이라 한다면

피를 나누며 가는 길 보다 큰 사랑 어디 있으랴           


내 가장 소중한 생명의 한 방울 한 방울이

남의 목숨을 향해 걸어 나가는 것을

하느님이 보고 계셨다면

하느님도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 피의 빈 자리에 채워주시리라        


노을의 복숭아빛은 하늘 가득 번지고

하늘 아래 꽃과 내가 아름답게 살아있다는 것이

한없이 고마운 저녁

피를 나누는 것보다 큰 사랑이 어디 있으랴     


그렇게 이 시는 헌혈자에게 바치는 헌시로 남게 되었다. 헌혈 나눔은 진정한 나눔이자 사랑이라 생각한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으로 단체헌혈이 취소되고 헌혈자가 급감해 혈액수급에 비상이 걸렸다. 적십자는 혈액부족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위해 국민들의 적극적인 헌혈 참여를 호소하고 있다. 혈액은 인공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피를 나누는 사랑의 실천이 절실한 시기다. 


그래서일까. 오늘 밤은 이 시가 더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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