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긴 사람에 대한 책임
에어컨이 자주 말썽이다. 작년 초 이사를 하면서 에어컨을 함께 옮겼는데 설치하는 과정에서 어디 문제가 생겼는지 틀 때마다 더운 바람이 나왔다. 에어컨 업체에 다시 전화를 했고, 각기 다른 수리기사가 세 번 집을 다녀갔다. 신기하게도 와서 만져주면 잘 되었다가 가고 며칠 지나면 또 안 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러면서 여름이 지나갔다.
올해는 작년보다 덥다는 예보를 접했다. "이번에도 혹시~ " 2주 전 점검차 에어컨을 틀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더운 바람이 나왔다. 설치업체에 다시 연락해서 집주소와 상태를 얘기했더니 어느 집인지 대충 알겠다는 눈치다. 하염없이 기다린 지 10일 만에 젊은 수리기사님이 오셨다.
이 수리기사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듯 보였다. 이번에는 에어컨을 완벽하게 수리해서 우리 집에는 영영 다시 오지 않겠다는 각오가 엿보였다. 어느 부위가 문제인지 하나하나 살펴보겠다고 했다. 중간중간 설명도 곁들여 주었다. 친절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리하는 데 1시간 30분 정도 걸렸고 에어컨이 정상 가동하는 것을 확인했다. (물론 좀 더 지켜봐야 안다. 이번 주말이 고비다).
장비를 주섬주섬 챙겨서 나가려는 기사님께 "수리비를 얼마 드려야 하나요?"라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업체가 설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원죄가 있지만, 너무 자주 와서 출장비도 안 남겠다 싶어서였다. 정말 적당한 금액을 부른다면 줄 의향도 있었다.
그런데 "아닙니다. 저희 업체를 믿고 맡겨 주셨는데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수리기사님의 말에 나는 감동했다. 친절한 데다 맡은 바 임무를 책임지는 마인드까지 장착하고 있다니. 이 수리기사님은 분명 나중에 성공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기사님과 기분 좋게 작별했다.
수리기사님은 갔지만 그가 한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믿고 맡긴다는 것과 맡아서 책임을 다한다는 것. 어찌 보면 일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상황과도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우리에게는 각자 고객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믿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그 책임을 져버리는 행위도 간혹 일어난다.
1년 전 돌봄서비스에 아이를 맡긴 맞벌이 부부가 14개월 된 자신의 아이가 돌보미에게 학대를 받았다고 국민청원을 올렸던 일이 있었다. 부모는 자기가 일하는 시간에 아이를 잘 맡아 줄 거라는 믿음으로 돌보미에게 맡겼지만 그 일을 맡은 사람은 그만한 책임감이 없었다. 책임의 결여가 학대라는 믿음의 배신으로 돌아왔다.
원금 손실이 없다는 은행직원의 말을 믿고 펀드에 가입했는데 적게는 수천만 원, 많게는 전재산 손실을 입었다는 기사를 봤다. 나라가 망해야 손실일 정도로 안전하다는 증권사 프라이빗뱅커의 말에 투자를 결정했는데 환매 중단이 나왔다는 사연도 있었다. 믿고 맡긴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일까.
몇 년 전 엉터리 법인을 설립해 모금한 기부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한 '어금니아빠'사건도 있었다. 최근에는 위안부 관련 기부금을 목적과 다르게 사용하였다고 후원자들이 반환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어떤 후원자는 어려운 형편에도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한 달에 100만 원의 후원금을 냈다고 하는데 회계부정 소식에 대한 충격은 더없이 컸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조직도 높은 수준의 책임을 요구받고 있다. 국민들의 믿음이 크기 때문에, 당연 책임도 크다. 사람들은 적십자라는 브랜드를 신뢰하여 기부금을 낸다. 맡기면 올바르게 집행할 거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또한 헌혈은 어떠한가. 헌혈은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헌혈자들은 혈액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운영해 줄 거라는 믿음으로 헌혈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그렇기에 책임을 다해야 하겠지.
믿음은 영원하지 않다. 불신하면 금세 돌아서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이 사실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책임을 다하는 자세, 그건 성원해 주고 믿어주는 사람에 대한 당연한 도리이자 성공의 비결이 아닐까. 에어컨 수리기사님이 나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