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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Sep 29. 2022

이 책부터 읽으세요. 솔페리노의 회상.

"5월 8일이 무슨 날인가요?"


신입직원은 부서별 교육을 받는다. 총무팀 교육을 받으러 온 신입직원 3명에게 어떤 말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생각하다가 때마침 5월이라 기념일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어버이날이요"라는 답변이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맞는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 5월 8일 하면 어버이날이 먼저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 나도 그랬으니깐. 나는 "맞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하고 나서 이 날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바로 적십자를 만든 앙리뒤낭의 생일을 기념해 만들어진 세계적십자의 날(World Red Cross and Crescent Day)이라는 걸 말이다.


전 세계 192개국에 48만 명의 직원, 1500만 명 이상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도주의 네트워크 적십자. 이 모든 것은 한 사람 앙리뒤낭과 그가 쓴 한 권의 책 <솔페리노의 회상(The memory of Solferino)>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었고, 곧 있으면 교육원 기초교육에 가야 하는데 사전과제로 이 책 독후감을 필히 써야 하니 미리 읽어보고 준비하라고도 알려주었다.


각 언어로 번역된 솔페리노의 회상


풋풋한 신입이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직장에서 고참이 되어 후배에게 이런 내용을 전하고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 사실 나도 입사하였을 때 모르는 것 투성이었고, 선배로부터 똑같이 "이 책부터 읽으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앙리뒤낭에 대해서는 입사를 준비하면서 홈페이지와 포털사이트에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책 <솔페리노의 회상>은 최근까지도 비매품이었기 때문에 입사하고 나서야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최근 이소노미아 출판사의 '휴머니타리안'과 김영사의 '솔페리노의 회상'이란 책으로 번역, 재편집 출간되었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엄청난 감동이 밀려와 내 인생이 홀라당 바뀌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이 훌륭한 건 알지만, 지구 반대편 유럽 국가의 지명과 200명이 넘는 생소한 인물이 낯설었던 데다 무엇보다 독후감 숙제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정작 이 책의 진가를 맛보게 된 시기는 입사하고 여러 해가 지났을 때였다. 봉사조직을 관리하는 구호복지팀에서 사회봉사 업무를 맡게 되면서 처음 입회하는 봉사원 앞에서 국제적십자운동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나는 평소 같은 책을 반복해서 잘 읽는 편은 아니지만, 봉사원 앞에서 실수하지 않고 하나라도 더 알려드릴려면 나부터 제대로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다시 책을 읽어보았다. 그랬더니 처음과는 달리 남는 것이 확실히 있었다. 아마도 입사한 이래 몇 년간 현장에서 경험을 쌓다 보니 예전에는 놓쳤던 게 달리 보였던 것 같다.


고작 13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얇은 책에서 내게 가장 와닿은 건 바로 전쟁의 잔혹함이었다. 전쟁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흔한 영웅적 서사도 없다. 죽은 사람들과 죽어가는 부상자들, 이를 간호하는 또 다른 선한 사람들이 나올 뿐이다.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장면을 읽을 때 그 장면이 떠올라 소름이 돋고,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어디 나만 그랬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역으로 구호단체 결성을 향한 지원과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군과 연합군은 유혈이 낭자한 시체더미 위에서 서로를 짓밟아 죽였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쳐 죽이거나 군도와 총검으로 배를 찔러 죽였다. 그들은 서로를 가차 없이 죽였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살장이었으며, 피에 굶주리고 피 맛에 취해 날뛰는 맹수들의 싸움이었다. 부상자들조차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서로 싸웠으며, 무기를 잃어버린 자들은 적군의 목덜미를 잡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 앙리뒤낭 / 솔페리노의 회상 p20~21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책 <솔페리노의 회상>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본다.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소중한 가족을 잃거나 생사도 모른 채 평생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 <솔페리노의 회상>은 전쟁으로부터 인류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보면서 글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강한지, 심지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파보면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전쟁은 평화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싸우고 있고, 중국과 대만은 긴장관계이며, 여전히 우리는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전쟁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안심하고 살아갈 그날은 언제일까. 전쟁은 신성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두의 공멸을 부를 뿐이다. 평화가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5월 8일은 나에게 의미가 하나 더 있다. 내 어머니의 생신이다. 어버이날이자, 세계적십자의 날이자, 어머니의 생신인 5월 8일. 내게는 여러모로 오래도록 기억하고 챙겨야 할 날인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에 썼던 솔페리노의 회상 - 이 책이 세상이 없었다면?을 다시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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