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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Oct 09. 2022

직업병에 걸렸어요

대학 3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마지막 전공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 C가 서둘러 가방을 쌌다. 급한 일이 있어서 곧장 강의실을 뛰쳐나갈 것 같은 C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

"알씨와이"

"거기 뭐하는 덴데?"

"봉사하는 데 있어. 오늘 중문에서 모임 한다고 해서. 아쒸~ 근데 선배들 술 엄청 먹는데..."

"너도 잘 먹잖아. 하하."


대담하고 엉뚱한 구석이 있는 친구 C가 봉사 모임에 나가고 있었다니 의아하게 생각됐지만 나는 그 일을 흘려버렸다. 그렇게 까마득히 잊고 지냈는데 입사하고 얼마쯤 지나서 이때 나눴던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혹시 C가 그날 간다고 했던 모임이 청소년적십자(RCY)를 말한 거였나? 대학RCY 출신에다 RCY본부에서 오래 근무한 선배 N과장님에게 C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럼. 잘 알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나는 입사 전에는 헌혈 말고 적십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다녔던 초, 중, 고등학교에 청소년단체 활동으로 RCY가 없었으니 그 용어조차 낯선 게 당연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회사의 일원이 되고 회사의 역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내 안에서 이상한 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못 보고 지나쳤던 빨간 십자가들이 내 레이더에 선명하게 잡힌 것이다. 무엇이 보였을까?


첫째, 일상에서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빨간색 더하기 표장이 붙어 있는 건물, 헌혈버스, 차량 등이 거리에서 눈에 들어왔다. 도로변에 있는 병원과 약국의 간판, 군 앰뷸런스, 뉴스에 나온 병원선, 장난감, 게임 캐릭터에서도 표장이 보였다. 이중 일부는 표장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사례이긴 했지만 말이다.

좌측부터 병원선, 일제 강점기 때 활동한 대한적십자사 응급구호반, 군 앰뷸런스
잘못 사용하고 있는 표장

둘째, 영화 속에서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는데 서울 택시기사인 배우 송강호가 광주 택시기사인 유해진을 만난 곳으로 광주적십자병원이 나왔다. 광주적십자병원은 당시 다른 병원이 문을 닫고 있을 때에도 의사와 간호사들이 철야근무를 하며 실제 의료활동을 펼친 곳이었다. 이밖에도 전쟁이나 재난을 다룬 영화에서는 적십자가 빠짐없이 등장했다. 대형터널사고를 소재로 다룬 영화 <터널>, 최악의 바이러스 감염질환을 다룬 <감기>에서는 적십자 구호품이 등장했고, 영화 <모가디슈>에서는 남북 대사관 직원들이 적십자 구조기를 타고 케냐로 탈출했다.

좌측: 영화 <택시운전사>, 우측: <모가디슈>

셋째, 책에서도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스콧 피처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가 "그녀는 내가 적십자로 가서 붕대를 만들 것이냐고 물었고"라는 한 대목을 만났다.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와 최연혁 교수의 <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 스웨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나다>에서도 적십자의 활동이 등장했다. <EBS 호모이코노미쿠스 6개월에 천만 원 모으기> 책에서는 헌혈이 소개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내가 알지 못한 책 속에 적십자는 숨겨져 있을 것이다.  


넷째, 관광지에서도 적십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10여 년쯤 전인가. 처갓집 식구들과 관광차 설악산국립공원에 갔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 정상 부근까지 걸어 올라갔더니 그곳에 적십자 산악구조대가 있었다. 제주도 이중섭미술관에 갔다가 화가의 생애를 쭉 읽어보는데, 그가 1956년 40세의 나이로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처럼 알게 모르게 적십자는 나의 일상 주변에서 자리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국내외를 불문하고. 밤새 돌아가는 보일러가 온기로 나에게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 주듯이, 내가 미처 주목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도 적십자는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알고 나면 이제 안 보일 수가 없다. 이게 나의 직업병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새로운 적십자를 만나게 될 때마다 아직도 기분이 좋다는 거다.




<좋아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다시 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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