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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Aug 03. 2022

건배사가 '사랑과 봉사'라구요?

첫 출근을 한 날, 이날만큼은 술자리가 없겠지 생각했다. 출근일이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8월의 첫날이라 일 끝나자마자 자취방으로 직행해서 온종일 흘린 땀 씻어내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 적십자에도 후배를 살뜰히 챙기는 눈치 없는(?) 선배들이 있었다.


퇴근 무렵 내게 다가온 선배 S는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요?“라고 물었고, 나는 거부하기 힘든 이 물음 앞에 아주 잠시 주저하다 선배들을 따라 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그날 밤 나는 선배들이 주는 환영 잔을 요령 없이 날름날름 받아먹다가 그만 술에 취하고 말았다. 다행히도 귀소 본능은 뛰어나서 가까스로 자취방에 돌아오긴 했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알람을 맞춰놓았어야 했는데 집에 들어가자마자 뻗어버리는 바람에 평소보다 늦게 잠에서 깨고 말았다. 눈을 뜨자마자 일이 벌어진 걸 느낀 나는 스프링처럼 일어나 대충 씻고 후다닥 옷 갈아입고 도로까지 달려서 택시를 잡고 회사에 가까스로 갔다. 하마터면 둘째 날부터 회사에 지각할 뻔했다. 인간이 다급하면 얼마나 초인적인 스피드를 내는지 몸소 증명한 아침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당혹스러운 순간이다.


술 마시는 직장인이라면 이런 아찔한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자칫하면 입사 초부터 술 먹고 지각하는 녀석이라는 오명을 남길 뻔 했지만 그때도 그렇고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술 마시고 직장에 지각해 본 적은 없다. 지금까지 딱 2번 지각을 했는데, 그건 술 때문이 아니라 눈이 내려서 도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술자리에서 또다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술로 인한 실수 때문이 아니라 회식 자리에서 들은 건배사 때문이었다. 건배사는 술자리에서 잔을 들어 축하하거나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하는 멘트다. 그날은 기관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술잔에 술을 모두 따르고 국장님께서 건배를 제의하셨는데, ”모두 잔을 높이 들어주십시오. 제가 사랑하면, 봉사라고 화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사랑과 봉사라니. 속으로 이게 뭔가 싶었다. 이제껏 내가 아는 건배사와는 차원이 다른, 이토록 경건한 건배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주변 선배들 표정을 살짝 살폈는데 다들 오래전부터 들어오던 익숙한 건배사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날 처음 알았다. 조직마다 고유한 건배사가 있겠지만,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인도주의 기관 적십자는 술자리에서도 인류애와 나눔을 강조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날부터 ‘사랑과 봉사’는 회식에서 꼭 빠지지 않고 들었고, 때로는 내가 건배사를 할 때 써 먹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사랑과 봉사’에 버금가는 새로운 건배사가 회사 내에 등장했다. 이름하여 ”뚜띠 프라텔리(Tutti Fratelli)“. 어느 윗분께서 적십자의 태생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솔페리노를 다녀오셨는지 이 말이 회자되었다. 처음 이 건배사를 들었을 때 나는 백화점에서 샀던 구두 이름을 떠올렸다. 이름은 뚜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구두를 신었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뚜띠 프라텔리는 ‘모든 사람은 형제다(All men are brothers)’라는 뜻이었다. 적십자의 건배스케일이 이 정도다. 둘 다 건배사로 아직도 등장하지만, 오리지널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봉사’가 훨씬 많이 등장하는 편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우리는 술자리에서도 이처럼 인류애를 강조할까. 틀에 박힌 멘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일반 직장과는 다른, 누군가를 돕는 일을 업으로 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리라. 나의 20년은 적십자의 오랜 역사 속에 스쳐가는 한 시점이지만, 그래도 나의 노력으로 누군가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에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3년째 코로나로 모두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기도 어렵고, 회식도 어렵다. 오늘 본 한 기사에 따르면, 일상회복 시대에 바람직한 회식 문화 중에는 ‘술 없는 회식’, ‘건배사 금지’도 들어있다고 한다. 이대로 가면 어쩌면 ‘사랑과 봉사’, ‘뚜띠 프라텔리’도 라떼는 말이야가 될 지도 모르겠다. 변화의 흐름이 우리 조직만 피해갈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술자리와 건배사가 아니라 그 말뜻 속에 담긴 의미를 함께 고민하며 이 길을 걸어가는 동료들끼리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요즘 들어 후배와 함께 자유롭게 술자리를 하고 싶은데, 말이 쉽게 떨어지지가 않는다. 





<사진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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