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유이든 부부 싸움 후 서로 말을 하지 않는 패턴이 익숙해지자 서로 관심 없이 사는 게 오히려 더 편하다는 것을 남자는 느끼게 되었다. 싸움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한 듯 넓은 아량을 가진 남자가 먼저 가서 화해 하자며 아양 아닌 아양을 떨고 그걸 마지못해 여자가 받아들이는 모양새도 이젠 짜증이 날만도 했고 대체 왜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도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 보다도 먼 꽃시장까지 찾아가 꽃을 사서 집으로 들어가 남자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여자의 화를 풀어 주려는 노력을 하거나 서로 퇴근 시간에 맞추어 여자에게 무슨 큰 죄를 저지르고 사과하는 듯 전화해서 외식이나 하자며 강아지 꼬리 흔들듯 아양 떠는 짓거리도 이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어디에서든 자신감이 충만하여 눈에 핏대 세우고 기세 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며 어쩌다 운전 중 더럽게 운전하는 놈들 보고 큰 소리로 쌍욕을 할 수 있고 친구들과 호기롭게 소주 두 세병 정도는 거뜬히 마셔 버리는데 집 에만 들어가면 가볍고 작으며 행여 야채 배달 박스 틈 속에 끼어 들어온 조그만 바퀴벌레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어서 잡으라고 악써대는 연약한 여자의 눈치를 봐야 되고 또 어떤 하기 싫은 일을 시킬지 그에 대한 반대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 강박에 소파나 침대에 편히 누워있지 못하고 전전 긍긍하는 모양새가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이런 언급은 정말이지 하고싶지 않지만 남자로써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오게되는 본능적 욕구를 풀어야 하기에 여자의 비위를 맞추고 꼬리를 흔드는 그 모양새가 정말이지 머랄까 수치스럽고 짜증나며 화나는 일이었다.
별일도 아닌 일에 화가 난 여자는 이불과 요를 다른 방으로 가져가 따로 자겠다고 한지 1주일이 넘어갔지만 남자는 내버려 두기로 했다.
아침이면 스스로 일어나 알아서 빵과 우유 한잔을 먹고 출근하였고 여자가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았으며 퇴근 후엔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이러니 편했고 어떤 강박도 사라졌다.
부부관계가 좋았을 땐 수시로 오는 전화를 받고 여자에게 일어난 별의별 일들을 내가 처한 상황(근무 중. 운전 중. 식사 중. 회의 중 등등)에도 가능하면 들어주고 반응해 주어야 했고 퇴근 후 일찍 집에 들어가 여자가 오기 전 하다못해 청소기를 돌린 다든지 저녁밥을 해놓는 다든지 아무튼 여자가 집에 들어와서 무언가 해놓은 것을 보고 만족할만한 일들을 해야 했고 여자가 좋아할 만한 일들을 찾아야 하는 강박에 시달렸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서 편해졌다.
불편한 거라면 좁은 집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다른 곳을 응시하거나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움직여야 하는 것이라든지 서로 투명 인간 취급을 일부러 해야 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이런 불편함을 제외하면 상당히 편했고 자유로웠는데 집에 들어와 내가 들으라는 듯 자기 친구들과 거의 두 시간 넘게 통화질 하면서 웃고 떠드는 것을 보면 여자도 남자와 입장이 마찬 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 일을 아무 간섭 없이 자유롭게 하며 사는 것과 부부간 웃음과 행복을 위해 여자의 요구와 똥고집을 들어주고 인정해주는 것들 중 무엇이 더 좋은가 에 대한 질문을 남자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하였지만 이렇다 할 해답을 내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수십 번 싸우고 화해해보았자 결국 또 싸우게 되고 이런 우스꽝스러운 결말이 다시 생기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도 좁은 집안 속 각자 다른 장소에서 홀로 어색한 시간을 허비하며 언제 끝날지 모를 이 냉전 상태가 끝나기를 서로 기다리며 한 이불속에서 만날 날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